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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남명 ‘을묘사직소’ 부울경 정신으로 승화시켜야- 김무만(합천용암서원 사무국장)

  • 기사입력 : 2022-05-26 20: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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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명 조식(1501~1572)은 조선 중기 당시 경상우도 유림의 종주였다. 지금의 합천군 삼가면 외토리(外家)에서 태어나 유년기에는 선친을 따라 서울을 비롯해 여러 곳을 다녔지만 주로 합천과 김해에서 생활했으며 지리산이 바라 보이는 산청에서 노년을 보내고 생을 마감했다.

    당시의 경상우도는 낙동강을 중심으로 우측 지역인 지금의 부산·울산·경남(부울경)을 말한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경상남도에서 부산과 울산이 분리됐지만 최근에 동남권메가시티로 다시 통합의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선생은 조선시대 중중, 명종, 선조시대를 살았던 인물로 중종 때부터 10여 차례 조정의 부름을 받았지만 모두 거절하고 처사로서 초야에 살면서도 누구보다 나라를 걱정하고 백성을 사랑한 참선비로 알려져 있다. 특히 조선 13대 임금인 명종은 1555년 을묘년 10월 11일에 선생을 단성(현, 산청군 단성면)현감으로 임명하지만 약 1개월 동안 삼가의 뇌룡정에서 작성한 사직상소문을 11월 19일 조정에 올린다. 이 ‘단성현감사직소’를 줄여서 단성소(丹城疏) 또는 을묘년(1555년)에 작성됐다 해 ‘을묘사직소’라고도 한다.

    이 상소문은 당시 명종을 비롯한 조정의 대신들은 물론 전국의 관리들과 훈구 및 사림의 유학자들에게 일대 경종을 울렸다. 선생은 이 상소문에서 단성현감을 사직하는 이유를 2가지로 설명하고 있는데 첫째는 자신은 명성이 잘못 알려져서 그렇지 능력이 안된다고 겸손해 하고 있다. 두 번째는 이미 온 나라가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잘못돼 있는데 가봐야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뜻을 명확히 밝히고 있다.

    같은 해 남해에서 발생한 을묘왜변에 대해 언급했는데 이때부터 제자들에게 왜(일본)의 침략에 대한 대책을 학습시킨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임진왜란 때 구국의 3대 의병장인 곽재우, 김면, 정인홍 등이 출현한 것이다.

    또한 인재를 등용할 때는 외면상 보이는 것만 보고 판단하지 말기를 명종에게 권고하면서, 부디 마음을 바로하는 것으로 백성을 다스리고 국가의 법도를 세워야 한다는 내용의 상소문을 ‘매사이문(昧死以聞)’ 즉 “목숨 걸고 아뢴다”는 것으로 끝맺고 있다.

    부울경 메가시티 추진 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분야는 눈에 보이는 인프라 구축도 중요하지만 부울경 시민의 가치관과 문화의 뿌리인 정신 즉 혼(魂)도 매우 중요하다. 남명의 단성소에 나타난 우국애민과 매사정신을 부울경 정신의 모태로 삼아 승화시켜야 한다. 경남도와 합천군에서는 ‘을묘사직소’ 정신의 확산과 ‘남명조식’ 교과서 수록 촉진 운동 등을 선도해 “민족의 스승”으로 추앙하는 동시에 관련 유적을 성역화하는 등 관광자원화를 위한 활용 방안도 동시에 모색해야 할 것이다.

    김무만(합천용암서원 사무국장)

    ※소통마당에 실린 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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