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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2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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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속으로] 54년 나전칠기 외길 정찬복 나전장

끊음질만 수백·수천 번… 장인의 손길, 예술이 되다

  • 기사입력 : 2022-06-08 22:0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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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실처럼 켜낸 자개(조개 껍데기) 위 상사칼을 조심스럽게 대고 ‘툭’ 끊어낸다. 굳은살이 두텁게 박힌 투박한 엄지 손가락이 훑고 지나간 자리에는 이리 보면 자색이고 저리 보면 청색인 얇은 자개가 가지런히 누워있다. 다시 한번 칼을 들어 자개를 끊어낸다. 이는 ‘끊음질’이다. 끊음질은 오로지 조개 껍데기를 가공해 기물의 면 등에 붙이는 나전(螺鈿)의 기법을 설명하기 위해 국어사전에 오른 순 우리말이다. 끊음질은 나전의 꽃이자 진수다. 적게는 불과 몇 ㎜의 길이로 자개를 일정하게 끊어내는 작업에 상사칼의 각도와 방향, 심지어는 숨결 한 줌도 자개의 빛깔을 다르게 만드는 변수가 된다. 툭툭툭. 그렇게 함(函) 위로 수십 번, 수백 번, 수천 번을 끊음질을 한다.

    정찬복 나전장(70)이 작업을 끝낸 함을 들어 올린다. 기계로 찍어낸 듯 섬세하고 정교한 문양이 오색으로 빛난다. 자개를 켜켜이 쌓고, 오리고, 끊어내 비로소 만들어지는 나전칠기(螺鈿漆器). 장인의 오랜 인내와 그보다 더 무거운 세월들이 이 오색 자개위로 함께 빛을 발하고 있다.

    정찬복 나전장이 상사칼로 실처럼 켜낸 자개를 끊음질하고 있다.
    정찬복 나전장이 상사칼로 실처럼 켜낸 자개를 끊음질하고 있다.

    ◇자개 조각보다 빛났던 통영 나전칠기 전성시대= 통영 정량동에서 찾은 정 나전장의 작업장. 작업장 곳곳에는 전복과 조개 껍데기와 톱으로 모양을 따놓은 자개 조각들이 흩어져 있다. 뚜껑이 열린 허름한 밥솥 안에는 갈색 아교(阿膠)가 끓어오른다. 벽면에는 ‘나전칠기 체험’이라는 현수막 패널이 비스듬히 기대있다. 이곳은 나전장의 작업실이자 나전칠기 교육장이다.

    정 나전장은 2010년부터 나전칠기를 알리기 위해 학생과 관광객 등을 대상으로 나전칠기 체험을 진행하고 있다. 그는 체험에 앞서 늘 나전칠기의 역사를 전한다.

    통영은 장인과 공예의 고장이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삼도수군통제영이 통영에 들어서면서 12공방이 설치돼 이곳에 전국 팔도 장인들이 모여들었다. 통영 12공방에서는 군수 물자와 진상품, 생활 용품까지 만들었다. 그중 나전칠기를 다루는 상하칠방은 유독 그 명성이 뛰어났다. 한류(寒流)와 난류(暖流)가 만나는 통영 앞바다 조개껍데기는 유독 색이 곱고 화려했기에 통영 나전칠기는 전국에서 ‘으뜸’이었다.

    그때부터 나전칠기는 부의 상징이었다. 나전칠기 소반, 장롱, 그릇은 인기 혼수용품이었다. 안방을 차지한 화려한 자개장 하나로 그 집안의 품격이 정해졌다. 1980년대까지 그 전성시대는 이어졌다. 정 나전장이 증언한다.

    “내가 공방에 들어설 당시 통영에 양복 제단 기술, 선박을 만드는 철강 기술 이런 게 유명했지. 그런데 그중에서도 나전칠기가 제일 유명했어. 전국에서 통영 나전칠기를 얻기 위해 애를 썼지.”

    당시를 회고하는 정 나전장의 눈은 자개 조각을 뿌려놓은 것처럼 반짝거렸다. 나전칠기 장인들의 가장 찬란했던 순간들이었다.

    정 나전장이 정교한 손길로 자개함을 만들고 있다.
    정 나전장이 정교한 손길로 자개함을 만들고 있다.
    정 나전장이 자개함을 들어보이고 있다.
    정 나전장이 자개함을 들어보이고 있다.

    ◇조개 줍던 소년이 나전장이 되기까지= 그런 배경 속에서 통영 토박이인 정 나전장이 나전칠기의 길을 걸은 것은 당연한 순차였을지도 모른다. 통영 앞바다가 근접한 정량동 멘데마을에서 태어난 정 나전장은 어린 시절부터 바닷가에서 조개껍데기들을 주워 다녔다.

    “당시는 나전칠기보다는 ‘자개장’으로 많이 불렸는데, 어디를 가나 통영 자개장이 최고라는 얘기가 들리니 관심이 갈 수밖에 없었어. 앞바다 지척에 깔린 이 조개껍데기가 그리 비싼 작품이 된다잖아.”

    정 나전장은 돈을 많이 벌고 싶었다. 그는 어머니의 뱃속에 있을 때 아버지를 여의었다. 어머니는 동이 틀 때부터 어스름 무렵까지 홀로 너른 밭에서 일하며 정 나전장을 키웠다. 그는 언제나 어머니의 고생을 덜어주고 싶었다. 그리고 1968년, 중학교를 졸업하던 그해 나전칠기 공방에 발을 들였다.

    허드렛일을 하는 와중에도 까치발로 장인들의 기술을 틈틈이 엿보다가 얼마안가 수강생 신분으로 직접 자개를 쥐게 됐다. 소년 정찬복은 그 나이대의 어린 수강생 중에서도 단연 돋보였다. 다른 이는 허투루 넘어갈 부분도 집요하게 다듬어 흠이 없었다. 그는 공방에 발을 들인지 1년 만에 첫 월급 500원을 손에 쥐었다. 곧장 어머니에게 선물할 빨간 내의를 사들고 집으로 돌아갔다. 어머니는 첫 선물을 받고 환한 웃음을 터뜨렸지만 그해 아버지의 곁으로 떠났다.

    “어머니 말로는 아버지가 생전에 갓을 만드는 일을 했다고 해. 어머니는 내가 아버지의 꼼꼼한 손재주를 타고 났다고 생각했지.”

    이후로도 정 나전장은 꾸준히 공방을 다녔다. 자개를 갈고 붙이며 하나둘 그의 작품들이 늘어났다. 정 나전장의 손끝에서 탄생하는 자개 문양은 치밀하고 섬세했다. 동경, 방콕 등 국제박람회에 한국의 공예 장인으로서 작품을 올리고 전국 공예대전 등 각종 공예품 대회에서 상을 쓸어 담았다. 지난 2010년에는 ‘경남도 최고장인’으로 선정됐다. 경남도가 선정을 시작한 이래 나전칠기로 최고장인에 오른 이는 정 나전장을 포함해 단 3명뿐이다.

    정 나전장이 만든 나전칠기 작품들.
    정 나전장이 만든 나전칠기 작품들.
    정 나전장이 만든 나전칠기 작품들.
    정 나전장이 만든 나전칠기 작품들.
    정 나전장이 만든 나전칠기 작품들.
    정 나전장이 만든 나전칠기 작품들.

    ◇시대가 외면해도 전통 가치 지켜주길= 정 나전장은 그가 공방에 처음 들어섰던 1960년대, 나전칠기 기술자를 2000여 명으로 기억하고 있다. 당시 통영의 인구수가 8만 언저리였던 것을 생각하면 통영 나전칠기가 지역에서 어떤 위치에 있었는지 실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문화도 생활도 바뀌기 시작했다. 주택에서 아파트로 변화하는 주거 환경에는 소반과 장롱이 필요하지 않았다. 장인들의 땀과 노력을 비집고 공장 기계가 만들어낸 특수 자개박이 나오면서 전통 나전칠기 장인들은 점차 설 자리를 잃어갔다.

    이제 통영 나전칠기 장인은 10명도 채 되지 않는다. 1990년대부터 수많았던 기술자들이 공방을 떠나기 시작했다. 제대로 된 자개장 하나를 만들기 위해 걸리는 시간은 짧으면 반년, 길면 2년이다. 눈앞이 캄캄해질 만큼 오랜 시간을 집중해야 하는 작업이지만 시간이 갈수록 작품의 가치를 알아보고 찾는 사람은 적어졌다.

    정 나전장은 오랜 시간 민족의 삶에 스며들어 시대를 풍미했던 전통 공예 예술이 점차 사그라지는 것에 탄식한다. 무엇보다 계승자를 찾을 수 없어 수세기간 돌고 돌았던 나전칠기의 명맥이 끊길 수 있다는 것이 제일 두렵다. 나전 기술을 취미로 배우려는 사람은 있지만 진지하게 업으로 삼으려는 사람은 없다. 그는 국가 무형문화재인 나전칠기가 후대에도 이어질 수 있도록 국가와 지자체가 힘을 실어줘야 한다고 얘기한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나전칠기가 후대에도 남을 수 있는 길이야. 이미 나이가 지긋한 우리 장인들에게 시대를 거스를 방도가 어디 있겠어. 그저 이 가치를 조금이라도 안다면 나전칠기의 명맥을 이을 수 있도록 국가와 지자체가 나서줬으면 해. 우리가 조금이라도 자개를 이어 붙일 힘이 닿을 때까지….”

    글·사진= 어태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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