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  |   유튜브  |   facebook  |   newsstand  |   지면보기   |  
2022년 10월 06일 (목)
전체메뉴

[문인이 만난 우리 시대의 명인] ⑪ 국가무형문화재 64호 두석장 김극천

쇳조각 두드리고 달구며 ‘300년 통제영 문화’ 잇다

  • 기사입력 : 2022-07-13 22:08:36
  •   
  • “내가 만든 나비 한 쌍이 날아 백년해로 떠나듯 푸른 통영바다 저편 매물도에 닿고, 내가 만든 박쥐가 아이들 발자국소리 들을 수 없는 이 도시에 왁자지껄 다산의 잉태로 거듭난다면 두석장 한 생은 후회 없을 게지요. 세상에 버려지지 않는 것 어디 있겠소만, 발길에 채이는 쇠붙이 하나로 대한민국이 지정해준 문화재가 되었으니 굽어진 팔자는 제대로 고친 셈이지요. 두드리고 달구고 담금질하다 보면 한낱 녹슨 쇳조각도 전통을 살린 멋진 공예품이 되는 이치가 꼭 내 인생 같아서 찰떡처럼 정붙이며 살아왔다오.”

    두석장 김극천(70)의 작업장을 찾았다. 충렬사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건너편 명정동 오래된 골목, 다닥다닥 붙은 작은 집들 사이, 한 대문을 여니 특유의 사람 좋은 미소로 손을 잡는다. 공방은 좁지만 앉아 작업하는 장인에겐 외려 정겨운 공간이다. 망치, 줄, 정 등등 온갖 작업도구들이 즐비하게 걸려 있고, 옆방엔 각종 장식을 단 소목가구들이 보인다. 섬세한 장식일수록 오래 고단한 일을 해 온 투박한 손에서 탄생하는가 보다.

    두석장 김극천씨가 거멍쇠 반닫이 장석을 들어보이고 있다./이달균 시인/
    두석장 김극천씨가 거멍쇠 반닫이 장석을 들어보이고 있다./이달균 시인/

    조선의 법전인 ‘경국대전’에 두석장(豆錫匠)이라는 호칭이 등장한다. 공조(工曹)에 속한 두석장은 주석·아연을 합금한 놋쇠(황동)를 이용해 두석을 만들었다. 그러므로 당시에도 두석으로 장식한 장롱은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가구는 아니었다. 상당한 고가품이었기에 벼슬아치거나 살림 있는 중인 집안의 여염집 아낙들이 선호한 물건이었다.

    두석이라고 할 때 쓰이는 글자는 콩 두(豆) 자다. 쇳조각과 콩은 금방 연관을 잇기 힘들다. 장석 제조과정에서 합금을 만들어 두드리고 달구기를 반복하다 보면 “달궈진 합금에 망치 두드리는 소리가 흡사 ‘타당!’하고 콩 떨어지는 소리가 난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하지만 어떤 이는 “합금이 메주콩처럼 누런빛을 띤다” 하여 불렸다는 설이 있다 하니 어느 것도 정설로 받아들이기엔 약간 무리가 있어 보인다.

    나비 장석이 달린 거멍쇠 반닫이.
    나비 장석이 달린 거멍쇠 반닫이.

    주석 재료는 구리 70%, 아연 30%의 합금인데, 19세기 들어서는 화려한 은백색의 백동이 주로 쓰인다. 백동 장석의 재료는 황동 70%, 니켈 30%로 합금하는데 그도 백동을 즐겨 사용한다. 일제가 패망한 뒤 전쟁에 사용된 탄피나 일본 동전이 많았는데, 이들 금속이 함유한 것이 니켈이었다. 당시엔 실제 탄피와 동전을 녹여 두석에 사용하기도 했다고 한다.

    통영 두석은 300년 통제영 문화의 얼이 살아 있는 공예품이다. 나전칠기와 두석은 뗄 수 없는 관계를 맺는다. 모든 소목 가구의 맨 마지막은 두석이 장식한다. 장의 크기와 모양에 맞춰야 하기에 미리 제작해 두기보다는 주어진 가구에 맞게 들쇠, 경첩을 제작하여 부착해야 한다. 아무리 아름다운 나전 경함도 두석이 부착되지 않으면 미완의 작품이 되고 만다.

    여러 종류의 두석장.
    여러 종류의 두석장.

    두석장 김극천은 4대를 이어온 통영의 토박이 두석장이다. 4대 위를 거슬러가면 증조부인 김호익 선생에 닿는다. 삼도수군 통제영 12공방에서 주석방으로 종사했으나 임진란이 끝나면서 폐방되었고, 자연스레 할아버지 김춘국으로 이어져 명정동 숲밭터공방을 열게 된다. 그렇게 가업은 다시 아버지 김덕용으로 이어졌고, 마침내 1980년 중요무형문화재 두석장 기능보유자 64호로 지정된다. 두석장 김극천의 삶 또한 아버지로부터 비롯된다. 당시 통영12공방 공예는 최고의 인기 상품이었기에 한창 때는 김덕용의 공방 ‘충렬장식’엔 전국에서 온 기능인들 스무남은 명이 숙식하며 기술 전수를 받으며 생활하기도 했다. 조부와 부친의 시대엔 백동이 최상급품이었기에 전국에서 주문이 쇄도했다고 한다.

    김극천이 두석과 연을 맺은 것은 고등학교 1학년(1970년) 시절이라 한다. 아버지 공방에서 틈틈이 장석에 광을 내거나 붙이기를 하는 등 조금씩 재미를 들여가곤 했으나 장석장이 되리라곤 생각지 못했다. 군 제대 후, 다른 생업을 찾아 한국특강이란 회사에 취직했으나 두석장의 길은 운명이 되고 말았다. 하필 아버지가 보증을 선 것이 잘못돼 공장도 집도 전부 잃게 되었다. 그런 가세를 극복하기 위해 두석 일에 투신하게 됐으며 그 외길을 선택하면서 전수장학생, 이수자, 전수조교를 거쳐 2000년도에 국가중요무형문화재 64호로 지정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괴목머릿장, 흑감나무머릿장 등.
    괴목머릿장, 흑감나무머릿장 등.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하나를 만들어도 뒷손 보지 않게 꼼꼼이 만들어라. 시간이 걸리더라도 정확하게 만드는 것이 제대로 된 장인이다.”

    하지만 자신은 엉덩이가 무겁지 않아 그런 아버지를 따라가지 못한다며 웃는다.

    두석은 인내의 미학이다. 주석을 만들고 난 후, 가구의 완성을 기다려야 하고, 정확한 치수를 잰 후에 양복을 가봉하듯 크기를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실톱과 작두, 줄로 모양을 만들어 수십 차례 딱달(망치질)한 후 정으로 문양을 만들고 사기 분말을 묻힌 천으로 광을 내어 부착시킨다. 못 하나도 그냥 쓰지 않고 줄로 가장자리를 다듬어 사용한다. 그래야 이음새가 견고해지고 여닫이 기능도 쉬워진다. 공정도 여러 차례라 여간 까다롭지 않다. 어느 것 하나 예사롭게 지나가면 완성에 이르지 못한다. 여름엔 쇳물을 녹이는 도가니와 불화덕 곁에서 하는 작업이라 땀범벅이 된다. 작두와 그음쇠, 실톱대로 장석을 재단하고, 공근정, 굴림정, 걸림정, 못정 등등 이름도 생소한 도구들이 동원된다.

    장에 부착되는 문양들은 2000~3000여 종이 된다. 특히 통영지방에서는 나비, 태극, 박쥐, 물고기, 대나무, 복(福)자 문양을 많이 사용한다. 장롱들은 주로 안방에서 사용하기에 사랑, 화목 등의 염원을 상징한다. 나비는 진실한 사랑을, 박쥐는 다산을, 물고기는 ‘눈을 뜨고 잔다’하여 재물을 지키는 존재, 대나무는 절개를 뜻한다. 이런 문양들은 통영을 넘어 전국의 두석장이 즐겨 사용한다. 화초장 하나를 예로 들어도 이런 과정을 거쳐 완성된 작품이다. 아낙네들의 비녀, 장도, 빗 등을 넣는 작은 서랍간에 그네 타는 댕기머리 처녀나 각종 그림을 새겨넣은 문양으로 장식하면 부부간 애정은 더욱 애틋해질 듯하다.

    그러나 지금 두석은 어쩌면 사라질지도 모르는 것들 중 하나다. 민족 문화를 전승해 온 소중한 공예품이지만 서구화된 건축과 가옥의 변화, 전통에 대한 불확실한 인식, 경제적 뒷받침이 되지 않는다는 어려움 때문에 간신히 그 명맥만 잇고 있는 실정이다. 그나마 다행한 것은 아들 김진환(44)이 이수자가 되어 가업을 이을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달균(시인)
    이달균(시인)

    이달균 (시인)

    ※이 기사는 경남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원을 받았습니다.

  • < 경남신문의 콘텐츠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전재·크롤링·복사·재배포를 금합니다. >
  • ※ 관련기사
  •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플러스 카카오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