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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0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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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이 만난 우리 시대의 명인] ⑫ 도무형문화재 진주 장도장 임장식

대를 이은 집요한 ‘쪼이질’로 ‘진주장도’만의 공예 구현

  • 기사입력 : 2022-07-20 21:2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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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초대기능보유자였던 선친으로부터
    장도 제작 모든 것 전수받아
    문양 새기는 전통 조각기법 ‘쪼이질’
    대를 이은 진주 장도장만의 자랑


    섭씨 3000도. 용암처럼 벌겋게 피어오르는 화염 속에 차가운 금속 하나가 천천히 달구어진다. 길고 납작한 금속이 불길 속에서 노랑에서 주황 그리고 마침내 핏빛으로 변해가는 동안 불길을 머금은 장도장기능보유자 임장식의 눈동자도 이글이글 타오른다. 마침내 최고조로 달아오르면 집게로 끄집어낸 뒤 두들겨서 일단 슴베작업 과정을 거친다. 슴베는 칼의 손잡이에 꽂히는 부분이다. 그다음 단조작업 과정으로 이어진다. 칼을 칼답게 만드는 과정이다. 그리고 수없는 담금질과정을 거치면서 서서히 날이 벼리어진다. 그 작은 쇳조각을 불에 달궈 수천 번을 내리치는 과정을 지나야 제대로 모양이 갖춰진다.

    숫돌에 갈며 날을 세우는 과정도 녹록지 않다. 갈고 또 갈며 날이 제대로 섰는지 푸른빛마저 도는 칼날을 눈앞에서 눕혀 가늠할 때 임장식의 눈빛은 백척간두에 서서 단 한 번의 승부를 노리는 무사의 눈빛처럼 빛났다. 짧은 순간 시퍼런 날 위로 전설들이 지나간다. 정절에 목숨을 걸었던 아랑낭자, 외적의 침입 때 자신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 은장도를 움켜쥐었던 수많은 조선 여인들의 독한 지조가 빛이라도 베어버릴 듯한 날을 따라 전율을 일으킨다. 작아도 칼이다. 생명을 단숨에 베는 무사들의 검이든 손안에 들어오는 작은 장도든 뭔가를 베기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는 똑같다. 그러니 날이 엉성하면 그건 칼이 아니다. 경상남도무형문화재 제10호 임장식(61) 진주 장도장보유자는 그렇게 자신이 담금질한 칼날 위를 35년간 외골수로 걸었다. 때로는 위태하게, 때로는 포기할 마음을 누르면서 지금까지 온 것이다.

    임장식 장도장 기능보유자가 은장도 전통 세공법 ‘쪼이질’로 10장생 중 하나인 사슴을 새겨넣고 있다./진주시/
    임장식 장도장 기능보유자가 은장도 전통 세공법 ‘쪼이질’로 10장생 중 하나인 사슴을 새겨넣고 있다./진주시/


    조선시대 생활용품이었던 ‘장도’
    신분·모양·특징따라 종류 다양
    1960년대 접는 칼 나오며 밀려났지만
    전통기법 고수하며 명맥 이어와


    임장식 보유자는 말한다. 사람들은 전설에 기대어 은근히 장도를 신비주의적으로 보는 경향이 있는데 사실은 조선시대 때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평범한 도구였고, 그게 1960년대까지 이어져 왔다고. 이후 공장에서 싸구려 접는 칼이 나오면서 시장에서 사라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가 꺼낸 접는 칼을 보니 필자도 초등학교 시절 연필 깎을 때 썼던 칼이다. 약간 헛웃음이 나왔다. 그러나 임장식 보유자는 정색하고 말한다. 옛날에는 누구나 장도를 가지고 다녔다는 것이다. 사과도 깎고 무도 자르고 간단한 연장을 만들거나 손질할 때도 장도를 사용했다고 한다. 사용하는 데는 남녀구별도 없었고 반상구분도 없었다. 다만 신분과 빈부의 차이에 따른 제품의 질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서민들이 사용하던 목장도는 손잡이와 칼집이 나무로 만들어졌다. 모양에 따라 5~6가지로 나뉜다. 양반들은 더 고급한 재료로 만들어진 장도를 사용했고 종류도 훨씬 다양하다. 은으로 만든 은장도, 금으로 만든 금장도, 옥으로 만든 옥장도를 비롯해서 골장도, 칠보장도, 뿔장도 등이 있다. 모양에 따라 일자도, 을자도, 사모도, 팔모도로 나누어지고, 특징에 따라 첨사도, 부판장도, 몽개도, 맞배도 등으로 나눈다. 이 중 첨사장도는 젓가락이 부착되어 있는 것으로 당상관은 젓가락이 칼집 안에 들었고 당하관은 젓가락이 은장도 안에 들었다고 한다. 일반 백성부터 고관대작까지 장도만 보아도 어느 정도 신분의 높낮이를 알 수 있었던 셈이다.

    요즘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은장도 외에 만들지 않는다. 은장도마저도 만드는 숫자가 확 줄었다. 수요가 없기 때문이다. 작고 멋진 장식용 은장도는 한때 선물용으로 절정의 인기를 누렸지만 2015년 김영란법이 시행되면서 고객이 완전히 끊어졌다. 그래도 취미로 장도 만드는 것을 배우겠다는 문하생이 이어져 힘이 된다고 한다.

    서민들이 사용하던 목장도.
    서민들이 사용하던 목장도.
    양반들이 사용하던 은장도./진주장도장 전수교육관/
    양반들이 사용하던 은장도./진주장도장 전수교육관/

    장도(粧刀)는 장식을 한 칼이다. 그중 허리띠나 옷고름에 노리개와 함께 차는 것을 패도(佩刀), 주머니 속에 넣고 다니는 것은 낭도(囊刀)라고 하며 만드는 사람을 장도장(粧刀匠)이라고 한다. 예전엔 도자장(刀子匠)이라고 했지만 근래 들어 환도(環刀)같은 무기용 도검류를 만드는 사람과 구분하기 위해 만들어진 명칭이다.

    하나의 장도를 만드는 과정은 어렵고 불편하며 지루한 작업이다. 과정을 나누면 잔손질 가는 부분은 빼고 명칭이 부여된 형식의 작업만 51가지 과정을 거친다. 과정을 큰 부분으로 나누면, 은판 마름질, 문양쪼이질, 칼집, 칼손잡이, 뒷매기, 두겁(칼집과 손잡이 연결부분), 두겁장식, 칼날설경, 칼날과 손잡이 고정, 고리 및 매듭장식 순으로 진행된다. 각 부분마다 세분화된 5~7단계의 작업과정이 진행된다고 생각하면 인내가 부족한 사람에겐 엄두가 안 나는 작업이다.

    특히 여러 과정 중 ‘문양쪼이질’은 끈기는 기본이고 재능은 필수다. 문양을 새기는 전통의 조각기법이자 진주 장도장의 자랑이다. 전국에 몇 군데의 장도장이 있지만 이 쪼이질 기법을 아직까지 고집하는 곳은 진주 장도장 뿐이다. 작은 정 하나로 수 천 수 만 번 쪼아서 손가락 마디 하나 정도 크기의 십장생을 표현하는 것은 지난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간단하게 찍어낼 방법도 있지만 임장식 보유자는 이 작업을 고수한다, 임장식 장도장이 그 이유에 대해 말했다. “전통의 가치를 지켜나가야 한다는 것은 아버지가 물려주신 철학이다. 주물이나 프레스로 찍으면 하루에 만들고 싶은 숫자대로 만들 수도 있다. 새가 모이를 쪼는 모양 같다고 해서 쪼이질이라고 하는데 손가락만한 면적에 종일 정을 쪼아대면 한 마디로 죽을 지경이다. 한 자루 만드는데 수만 번 쪼아야 한다. 하지만 전통을 버린다면 그건 장인이 아니다. 장사꾼이지.”

    “장도장 보존회·공예학교 만들어
    진주 장도 공예 우수성 알리고
    진주에 장도박물관 세우고 싶어”

    임장식 장도장 기능보유자
    임장식 장도장 기능보유자

    그 배경에는 선친의 확고한 철학이 있다. ‘돈을 생각하면서 작업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돈을 우선시하면 다량생산이 필수고 쉽게 빨리 만들면 질이 떨어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그래서 힘든 쪼이질로 조각을 하면서도 진주 장도의 가격은 오히려 다른 곳보다 훨씬 저렴하다. 다른 곳에서 200~300만원 하는 은장도 가격이 진주에서 50만원 정도인 것도 아버지 유언 때문이었다.

    지금의 임장식 보유자는 아버지로부터 장도 제작의 모든 것을 전수받았다. 초대기능보유자였던 선친 故임차출은 울산병영의 장도장이던 故김말호로부터 장도제작기술을 전수받았다. 고등학교 때 아버지가 담금질을 하면 곁에서 풀무로 바람 넣는 것을 도왔는데 ‘바람잡이’라고 하는 그 일이 은장도와의 첫 인연이었다고 했다. 대학에서 행정을 전공한 그에게 장도장은 전혀 다른 길로 빠진 셈이다. 그리고 40여 년이 흘렀다.

    임차출 임장식 2세대에 걸친 집요한 전통계승 작업은 ‘진주장도’라는 고유명사를 가진 진주만의 특별한 장도공예를 구현해냈다. 진주장도에 ‘특별함’이라는 수식어를 붙는 이유는 오히려 전통 쪼이질 조각기법을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발전시켜온 지극히 ‘평범한’ 진리에서 비롯된다. 그 중심에 미련할 정도의 고집을 가진 임차출 임장식 부자가 있다.

    앞으로의 포부에 대해서 묻자 임장식 보유자는 담담하게 말한다. “장도장 보존회를 만들고 진주 공예학교를 만들고 싶다. 이미 계획도 있다. 그를 통해 진주 장도의 미래를 담보하고 진주 전통공예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는 교두보로 삼고 싶다.” 그리고 전남 광양처럼 진주에도 진주 장도박물관을 만들고 싶다는 기대어린 포부를 말할 때는 잘 벼리어진 은장도의 날처럼 눈빛이 반짝였다.

    김홍섭 소설가
    김홍섭 소설가

    김홍섭(소설가)

    ※이 기사는 경남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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