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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2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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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있는 간이역] 이불 무덤- 천수호

  • 기사입력 : 2022-08-18 07:5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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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 집 이불 속 역사는 약사(略史)로만 전해진다

    저 속에서 얼마나 자주 아이를 잉태했었는지도

    저걸 덮고 큰언니가 죽어나간 일도

    어디에도 기록은 없다

    간단한 엄마의 말로 요약되어

    가끔 끙, 하는 신음 속에만 묻어나올 뿐

    완전한 진실은 다 묻혔다

    어린 내 발등에 차인 아버지 밥그릇이 두어 번 발라당 넘어졌어도

    아버지는 묵묵히 머리카락을 떼고 밥그릇을 다 비우셨고

    스테인리스 밥그릇의 절절 끓는 온기가 내 발끝을 자주 녹였다는 것도

    묵인된 역사였다

    누구 발등인지 모를 매끈한 살결에

    은근히 발을 잇대기도 했고

    그 촉감만큼 매끄러운 눈물도 이불 속에서는 잘 묻혔다

    부화된 아이들은 무럭무럭 그 이불 속에서 자랐고

    이불 속으로 도저히 두 발을 숨길 수 없을 때는

    하나씩 집을 떠나갔다

    하얀 목화솜이 따글따글 씨앗처럼 여물어졌어도

    이불은 아직 색동무늬 밑에 그 뼈다귀들을 묻어놓고 있다


    ☞구들방 아랫목에 눌어붙은 가난쯤이야 어머니의 한 땀 한 땀 시친 색동이불로 눌러두면 그만이었다. 언 발을 불쑥 집어넣다 엎은 아버지의 밥그릇이 수시로 이겨진 채 상에 올랐던 그 시절, 이불은 추억의 대명사로 누구나 할 말이 많다. 두근대는 사춘기의 심장 소리를 감춰주느라 귀퉁이 넷을 몰아주기도 했으며 발을 잇댄 체 이불 위에서는 할머니께 민화투를 배우기도 했다.

    이 시에서의 반전은 ‘무덤’이라는 데에 있다. 생사화복을 비롯한 집안의 모든 내력을 그때그때 덮어주고 들어주며 다독여 준 목화솜 같은 어머니야말로 진실을 함구한 이불 무덤. 허리가 굽을수록 가슴께가 뻐근한 까닭은 아마도 묻어놓은 가족사 때문이 아닐까. 모로 돌아누울 때마다 끙, 하신다.

    천융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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