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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0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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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칼럼] 구름 속에서- 심윤경(소설가)

  • 기사입력 : 2022-09-22 19: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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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떤 양면성으로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일들이 있다. 나에게는 대학교 3학년 겨울에 떠났던 해남 여행이 그랬다. 나를 포함한 네 명의 여학생들이 배낭 하나씩 들고 땅끝 마을로 향했고 즉흥적으로 보길도까지 다녀왔다. 넷 다 주머니가 가벼웠으나 열정적으로 많은 곳을 다녔으며 잊지 못할 경험들을 했다.

    우리는 광주역 앞 음식점에서 여행의 첫 끼니를 해결하게 됐다. 사람들이 기차와 버스를 갈아타는 틈새 시간에 빠르게 한 끼를 해결하는 흔한 식당들이 십여 개나 늘어서 있었는데 그 중 하나였다. 벽에 높직하게 올라 붙은 메뉴판에는 30가지가 넘어 보이는 음식들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우리는 메뉴판을 보면서 음식을 고르기 시작했는데, 볶음밥, 김치찌개, 된장찌개 등등의 평범한 메뉴가 물망에 오르는 순간 불벼락이 떨어졌다.

    “통일해 이x들아!”

    갑작스러운 욕설에 번쩍 각성돼 우리는 1초 만에 볶음밥 4인분으로 통일했다. 주방에서는 계속해서 욕설이 쏟아졌다. “싸가지 없는 x들이 처싸돌아댕기면서 사람 바쁜 시간에 이거 저거 시켜 쌓고 싸가지 없는 x들이….”

    우리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아무 문제 없이 각자 먹고 싶은 것을 주문해 잘 먹고 있었다. 우리는 놀라고 부끄러웠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기분을 상한 것은 분명해서 음식을 먹지 말고 나갈 것인가 조용히 의논하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가 뭔가 행동을 취하기도 전에 번개처럼 빨리 음식이 나왔다. 우리는 대충 먹고 얼른 떠나자는 눈 짓을 주고받으며 상한 마음으로 말없이 볶음밥을 한입 먹었다.

    그리고 우리 인생 최대의 반전이 일어났다. 볶음밥은 정말이지 태어나 먹어본 어느 유명 음식점보다도 뛰어나게 맛있었다. 기차역 앞 허름한 음식점에서 호남의 손맛을 볼 것이라고는 결코 기대하지 않았던 우리는 깜짝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우리 얼굴을 예의 주시하던 사나운 주인 아주머니는 껄껄 웃기 시작했다.

    “어딜 가거든 싸가지 있게 굴어! 기집애들이 사람 바쁜데 눈치 없이 굴지 말고!”

    그 말에는 분명히 아까와는 다른 온기가 묻어 있었다. 우리는 마지막 밥풀 하나까지 싹싹 긁어 먹고 아주머니와 서로 웃음 섞인 인사를 주고받은 후 버스를 타고 해남으로 향했다.

    나는 이 일화로 술자리의 좌중을 즐겁게 하는 데에 한번도 실패하지 않았다. 그리고 비슷한 상황에서 남자들은 정확하게 정반대의 경험을 한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똑같이 돈 없고 어리숙하게 여행을 다녔던 그들은 시골 식당에서 언제나 환대와 귀여움을 받았으며 계란후라이 같은 것이 덤으로 더 얹혀 나오는 식의 경험들을 했다.

    가장 중요한 장면을 임팩트 있게 전달했고 주절주절 말이 길어봤자 좋을 것이 없으므로 나는 그 여행의 더 자세한 장면들은 묘사하지 않는다. ‘놀고 가자’며 우리를 쫓아오던 네 명의 남자들이나, 매운탕에 공기밥 네 개를 주문했다가 쫓겨나고 만 횟집 같은 일들은 하나도 재미있지 않으므로 이야깃거리가 되지 못한다. 그곳의 아름다운 풍경이나 신경 써서 기념사진을 찍어주고 덕담을 건네던 친절한 동네 사람들, 새살거리며 밤새 놀던 우리의 젊음 같은 것들로 그것은 충분히 즐거운 여행이었다고 결론지을 만했다. 우리는 아무도 죽거나 강간 당하지 않고 무사히 여행에서 돌아왔다. 우리를 스쳐간 것들은 ㄴ자 욕설이 붙기는 했으나 어디 가면 ‘싸가지’를 챙기라는 가르침, 또는 함께 놀고 가자는 제안 같은 것들에 불과했다. 쉽사리 호의의 가면을 쓰는 혐오 표현에 우리는 적극적인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때 스물두 살이었던 우리를 스쳐갔던 공포 같은 것은 이야깃거리가 되지 못한다. 세상 여성들의 속을 털어보면 그런 먼지 같은 일들이 수없이 쏟아져 나올 것인데, 그런 걸 말해봤자 별일 아니라고, 좋은 뜻이었다고, 너희가 먼저 잘못한 것이 아니냐고, 왜 그렇게 예민하냐고 되묻는 목소리에 부딪치기 일쑤다. 우리를 둘러싼 공기 속에는 그런 수많은 먼지 같은 일들이 있었고, 보이지 않으나 거대한 그 먼지 구름은 끝내 사람이 목숨을 잃거나 크게 다치는 사건으로까지 연결되고 야 만다.

    비가 오지 않으나 날이 흐리다. 신당역 사건으로 목숨을 잃으신 희생자의 명복을 빈다.

    심윤경(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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