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  |   유튜브  |   facebook  |   newsstand  |   지면보기   |  
2022년 09월 25일 (일)
전체메뉴

[문인이 만난 우리 시대의 명인] (20) 가야진용신제 예능보유자 김진규

천년을 이어온 전통제례, 또 다른 천년 위해 이어가야죠

  • 기사입력 : 2022-09-23 10:37:03
  •   
  • 신라시대 매년 봄·가을에 칙사를 보내
    큰 강 있는 4곳서 국가의식 제사 올려
    나라와 백성들의 평안 기원

    삼랑진에서 낙동강을 따라 양산 쪽으로 가다 보면 원동면 용당리 나루에 위치한 가야진사를 만날 수 있다. 댐이 없던 옛날에는 장마철이면 그 일대가 홍수에 잠기곤 했다. 지금은 산책할 수 있도록 공원이 쾌적하게 잘 조성되어 있는데 강물에 꿈틀대는 듯한 용 세 마리의 석상을 볼 수 있다. 공원에서 낙동강 쪽으로 내려오면 네모난 제단과 가야진사의 옛 건물이 자리한다. 이곳은 고대 신라가 가야와 대치하고 있을 때 전쟁을 수행하는 장소로, 국가에서는 해마다 제를 지내며 전쟁의 승리와 마을 사람들의 무사안위를 기원했던 곳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가야진사는 신라가 매년 봄과 가을에 칙사(정부에서 내려온 관리)를 보내 국가의식으로 제사를 지냈으며, 서라벌을 중심으로 동서남북 네 방향에 위치한 큰 강에 국가에서 봄과 가을에 향과 축문을 관찰사에게 보내 제를 지냈다. 지금은 네 곳 가운데 유일하게 남쪽 가야진(황산하)에서만 명맥이 이어지는 곳이라 한다.



    가야진용신제는 경남도 유형문화재 19호로 최초 예능보유자인 이장백(1914~1998) 선생에 이어 2004년 김진규 예능보유자가 제례 부문 가야진용신제 2대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그는 30년간 가야진용신제의 부흥과 후계자 양성을 위해 힘든 여건 속에서도 다각도로 노력해 왔다고 한다.

    김진규 가야진용신제보존회 회장을 원동면 신주주진길 그의 자택에서 만났다. 가야진이 유명해진 것은 이곳 진(津)에 전설이 있기 때문이다. 동국여지승람에 조선조 세종조에 용당에서 황용(黃龍)을 보았다는 기록이 비친다. 옛날 양주의 한 전령이 공무를 보고 길을 가다 주막에서 묵었는데, 꿈에 용이 나타났다. 용이 말하길 남편용이 첩만을 사랑하니 집안이 엉망이 되었다며 첩용을 죽여달라고 사정했다. 고개를 끄덕인 전령이 다음 날 첩용을 죽이러 용소에 갔는데, 실수로 남편용을 죽이고 말았다. 슬픔에 어쩔 줄 몰라 하던 본처용은 보답으로 전령을 모시고 용궁으로 갔다. 그 후 마을에 재앙이 그치지 않아, 사람들은 사당을 짓고 용 세 마리와 전령의 혼을 위로하기 위해 매년 봄과 가을에 돼지를 잡아, 용소에 던지며 제사를 지내고 있다고 한다.

    가야진사의 전설에만 용이 등장하는 이유에 대해 질문하자, 용은 비를 내려주는 신과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옛날에는 어느 나라 어떤 장소든 비가 제대로 내려야 곡식이 풍성하게 자라 백성들이 배불리 먹을 수 있고 나라가 강해져 전쟁에서도 백성을 지킬 수 있었다. 낙동강 유역을 통합했던 신라가 처음으로 한반도의 패권을 쥘 수 있었던 것은 낙동강 하류로 밀려온 기름진 땅으로 인한 풍요로운 농업생산력이 기반이었다고 할 수 있다.


    신라가 양산의 황산하에 가야진을 설치한 목적은 특히 황산강(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가야와 여러 차례 전쟁을 벌였기 때문에 두 나라의 군사들이 낙동강에 많이 빠져 죽었다. 그래서 그 군사들이 용으로 환생하였다는 전설이 나왔다고 보는 설도 있다. 국가는 그 지역에 제례를 거행함으로써 잠시 전쟁을 중단하고 가야진 주변 지역민들의 민심을 수습하려는 목적이 있었다. 또한 천신, 지신, 용신의 힘을 빌려 신성한 장소를 확실히 보호하고 군사적 요충지를 수호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수신(水神)인 용(龍)에게 조운(각 지방에서 거둔 조세인 현물을 수도로 운송하던 제도)의 안전을 기원하는 목적도 포함되었다. 장마철에는 홍수가 범람하는 것을 막고 오랫동안 가뭄이 지속될 때는 기우제(祈雨祭)도 병행하였다.

    일제 강점기 때 원동의 가야진사가 홍수에 잠기는 재난을 맞았다. 이후 일본관리들은 용신제를 금지한다. 용당리 당곡마을 주민들과 이장백(1914-1998)이 밤중에 지게를 지고 천태산 비석골에 올라가 사당을 모셨다. 그들은 음력 삼월이면 밤중에 음식과 제기를 지게를 지고 올라가 제를 올리며 그 맥을 유지해 왔다.

    이후 광복과 함께 가야진사는 원동면 용당리로 옮겨왔으며 1983년 경상남도 민속자료 7호로 지정됐고 1990년대 초 복원 공사를 통해 오늘의 모습을 갖췄다.

    가야진의 사당이 있는 이 나루터는 신라가 가야를 정벌할 때 왕래하던 곳으로 해마다 봄과 가을에 중앙에서 국가의식으로 제를 올려 전쟁의 승리와 백성들의 무사 안위를 빌었다. 제관이 된 양산군수의 권한은 막강했다 한다. 인근 지역 수령들이 봉로奉爐로 뽑혔을 때 순수의 명으로 향로에 불을 많이 담으면 손이 타더라도 땅에 놓지 못했다. 손이 땅에 닿으면 역적 취급을 받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삼월 정일(丁日)과 팔월 정일에 지내던 시제와 용신제에 기우제를 합해 매년 4월에 삽량문화축제와 함께 일반 시민과 관광객들이 구경하며 즐길 수 있도록 풍물놀이를 겸하여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용신제의 순서는 칙사를 맞기 전 부정을 쫓아내는 ‘부정가시기’로 행사를 시작한다. 다음은 칙사와 ‘칙사영접굿’을 하며 칙사와 제단으로 올라, 세 용에게 제를 올린다. 즉 용신제례다. 다음은 낙동강변으로 음식을 가지고 내려와 돼지를 배에 실어 낙동강 용왕에게 바치는 ‘용소풀이’를 한다. 마지막으로 풍악놀이를 즐기며 제례에 참여한 사람들과 풍물놀이를 하는 ‘사신풀이’를 하는 것으로 제를 마친다.

    올해 구순의 나이에도 해맑은 얼굴의 김진규 예능 보유자는 한자로 적힌 자료들을 보여주며 찬찬히 설명했다. 그러다 현관문을 밖으로 보이는 낙동강을 넌지시 바라봤다. 지나온 세월을 실감하는 듯 불어오는 바람에 마음을 맡기는 것도 같았다. 제를 지내온 향교 시절을 더듬으며 많이 늙었다고도 했다. 그는 상복을 꺼내입고 필자의 휴대폰에 사진을 찍을 수 있게 포즈를 취해주었다.

    천 년 전에 신라와 가야시대에도 흘렀고 지금도 여전히 흐르는 낙동강처럼 인간 역시 어딘가로 흘러갈 것이라는 사실, 그는 과거 선조들의 삶이 우리의 가슴에 되살아나 꽃을 피우고 있다는 사실. 선조들을 만나기 위해 우리가 가져야 할 것은 바람에 마음을 맡기고 잠시잠시 침묵과 여유를 가져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도 같았다.

    마지막으로 앞으로의 소망을 묻자, 그는 사람들이 웃고 즐기는 것에만 관심을 가지기보다 가야진용신제에, 특히 사라져가는 우리의 소중한 문화와 문화재에 따스한 관심을 가져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홍 혜 문소설가
    홍혜문 소설가

    홍혜문(소설가)

    ※이 기사는 경남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원을 받았습니다.

  • < 경남신문의 콘텐츠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전재·크롤링·복사·재배포를 금합니다. >
  • ※ 관련기사
  •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플러스 카카오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