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  |   유튜브  |   facebook  |   newsstand  |   지면보기   |  
2024년 06월 13일 (목)
전체메뉴

[문인이 만난 우리 시대의 명인] (23·끝) 진주 한량무 예능보유자 정행금

아흔 앞둔 ‘영원한 춤꾼’의 식지 않는 춤 사랑

  • 기사입력 : 2022-10-21 08:08:24
  •   
  • 정행금 선생은 1933년생으로(호적은 36년) 올해 89세이며, 진주 한량무의 전설적인 인물인 그의 스승의 스승인 최순이(1884~1969)선생과도 동시대 인물이다.

    진주 목사 정현석이 1872년 기록한 〈교방가요〉에 나오는 ‘승무’는 춤과 음악만으로 펼치는 무언의 공연 예술인 오늘날 ‘진주 한량무’의 전신이다.

    진주에서 한량무에 대한 문헌으로 정현석 이전의 것은 찾아보기 어렵지만, 1711년 임수간이 경상도 의성에서 공연을 보고 기록한 〈동사일기〉에 나오는 ‘승무’는 〈교방가요〉에 나오는 ‘승무’와 일맥상통할 것으로 보이고, 진주 한량무는 시대에 따라 변화와 진화를 계속해 왔다.

    한량무에서 한량이 색시에게 꽃신을 신겨 주는 장면.
    한량무에서 한량이 색시에게 꽃신을 신겨 주는 장면.

    정행금 선생은 선배들로부터 구전으로 들었다며 진주 한량무의 역사가 약 300년 정도라고 강조했는데,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조선 영·정조 때부터 농업 혁명이라 할 수 있는 이모작이 유행하게 되자 당시로서는 문화와 생활에 폭발적인 변화가 있었던 시기라 이 말은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영·정조 때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기자 1000년 넘게 매년 반복적으로 나무를 교체해 가며 사용하던 전국의 목빙고가 석빙고로 바뀌고, 중국 것만 추종하던 그림에서도 풍속화가 탄생하는 등 조선의 르네상스 시기라 여러 정황을 종합해 볼 때 이 시기에 ‘승무’가 지방 관아에서 유행했다는 말은 신빙성이 높아 보인다.

    진주 한량무 예능보유자 정행금 선생.
    진주 한량무 예능보유자 정행금 선생.

    정행금은 거제군 동부면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이웃에 있는 통영여중과 통영여고를 졸업했다. 학교 다닐 때 춤이 좋았으나, 완고한 부모님 때문에 무용을 하겠다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내 보지 못하고 살았다. 부모님이 작고한 후 30대 중반까지도 가슴 속에는 춤에 대한 뜨거운 불씨가 그대로 살아있어 춤을 배우기 위해 무작정 진주로 갔다.

    1933년 거제 동부면에서 태어나
    완고한 부모 때문에 무용 못하다
    30대 중반에 무작정 진주로
    강귀례 선생에 검무 등 배우며
    이수자 돼 학교서 전수활동도

    마침 가정주부들에게 춤을 가르친다는 모집 광고를 보고 찾아 간 곳이 광복 후 1세대 진주검무 예능보유자 강귀례 선생이 운영하는 학원이었다. 열정이 있어 보통 사람보다 검무를 빨리 배울 수 있었고, 이수자가 되어 학교에 가서 전수 활동을 하기도 했다. 늦게 입문했으나, 기억력이 좋고 열정을 가지고 배우자 강귀례 선생님이 특별히 예뻐했고, 내가 바느질을 업으로 아이를 키우는 것을 알고 “야, 이년아 너는 바느질로 먹고 살 년이 아니다. 빨리 집어 치우고 춤이나 더 열심히 추어” 라고 하는 말을 자주 들었다.

    공연 후 단원들. 남자는 김덕명, 색시 복장 정행금.
    공연 후 단원들. 남자는 김덕명, 색시 복장 정행금.

    선생님께서 시키는 대로 직업을 바꾸기 위해 통영과 진주에 학원을 개원하여 열심히 가르치면서 배웠다. 그의 스승 강귀례(1906~1978)는 황해도 해주와 경성의 종로 권번에서 춤을 가르치다 진주에 정착한 후 궁중무희였던 최순이 선생을 만나 다시 검무와 한량무 등 여러 춤을 배웠고, 1969년 사라질 뻔한 ‘승무’를 재연하고 명칭을 ‘한량무’로 고쳤다.

    강귀례 선생이 춘 한량무는 한량, 색시, 승려, 상좌가 나오는 4인 역이었다. 1976년 재연에 성공한 한량무를 가지고 개천예술제와 경상남도 민속예술경연대회에 나가 입상을 하고, 다음해인 1977년에 경상남도 민속예술경연대회에 다시 출전해 문화공보부 장관상을 수상했다.

    강귀례 선생은 노후에 심한 관절염으로 고생을 했는데, “너에게 춤을 더 이상 가르치지 못해 안타깝다”는 말을 하시다 1978년 작고하셨다. 1979년 진주 한량무 보존과 계승을 위해 김자진, 박세제씨가 주축이 되어 한량무를 잘 춘다는 양산의 김덕명 선생을 초빙했다. 김덕명 선생이 진주로 옴으로 해서 주모, 마당쇠, 별감 역이 기존의 한량무에 보태어져 7인의 한량무가 되어 더 재미있게 진화되었다.

    1969년 강귀례 선생이 ‘승무’ 재연
    이후 명칭 ‘한량무’로 고쳐 불러
    당시 4인 역서 7인 역으로 진화
    양반·색시 등 다양한 춤사위로
    풍자와 웃음의 공연예술로 자리

    젊었을 때 색시 공연 후 진양호에서.
    젊었을 때 색시 공연 후 진양호에서.

    1979년 단체가 경남무형문화재 제3호로 등록 되고, 1989년 역할별로 색시 역의 정행금 선생을 포함한 7명이 예능 보유자가 되었고, 그 후 문제가 생기자 2016년 예능보유자에 대한 재심을 하면서 정행금 선생 혼자 예능보유자가 되는 재정비가 있었다.

    현재의 진주 한량무는 7역 9과장으로 이루어져 있고, 마당쇠와 별감이 한 과장씩 나오고, 주모가 두 과장, 승려가 세 과장, 한량이 네 과장, 색시가 일곱 과장에 등장한다.

    진주 한량무의 명칭은 시대상을 대변해 왔다. 조선시대 때 승려 중에 내세(來歲)를 무기로 삼아 일은 안하고 바람이나 피고 놀고먹는 파계승에 대해 좋지 않게 생각하여 그를 무대에 세워 ‘승무’라 부르며 비판과 풍자의 대상으로 삼았고, 그 후 놀고먹는 사람의 대명사로 통하던 명칭인 ‘한량’을 부각시켜 해학과 웃음의 제물로 삼았다.

    정행금 선생의 한량무 공연(사진 오른쪽).
    정행금 선생의 한량무 공연(사진 오른쪽).

    한량이란 단어는 오래전부터 있었으나, 시대에 따라 개념은 좀 다르게 사용되었다. 조선 초는 대체로 무과에 급제하고 직을 못 받은 사람을 한량이라 부르다, 조선 후기로 내려오면 무과에 오르지 못하고 특별한 직업 없이 놀고먹는 사람을 한량이라 부르는 경우가 많았다. 대체로 무과에 도전 할 정도로 학문적 지식, 예술적 소양, 재력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승려나 한량은 모두 주류에서 밀려 난 사람들로 지조 없이 흔들리는 색시와 삼각관계를 이루며 풍자와 웃음의 소재거리가 되고 있다. 남자 중심사회에서 명칭을 ‘승무’, ‘한량무’라 부르며 남성을 앞세우고 있지만 극에서 사실상의 주인공은 여성인 색시이다. 승려와 한량이 소품으로 꽃신을 들고 색시를 유혹하는데, 꽃신은 재물과 성애의 상징으로 해석될 수 있어 에로틱한 공연예술이기도 하다.

    정행금 선생의 한량무 공연.
    정행금 선생의 한량무 공연.

    사람이 사는 곳에서는 실제 이런 경우가 흔히 일어나는 일이라 더 실감나게 한다. 미국의 배우이자 가수이며 모델로 활동한 유명한 섹스 심벌의 마릴린 먼로(1926~1962)가 남성 중심의 미국 사회에서 잘 나가는 남성들과 세 번의 연애와 결혼으로 남자 중심사회를 농락하여 세계를 떠들썩하게 뒤흔든 스캔들도 이런 경우라 할 수 있다. 재물과 욕망 앞에 인간은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가를 우리 선조들은 일찍이 알았고, 이를 스토리로 엮어 무언의 몸짓 극으로 만들어 즐겼던 것이다.

    악기는 장구 1명, 대금 1명, 아쟁 1명, 쇄납 1명 총 4명이 나와 연주를 하고, 장단은 자진모리, 굿거리, 염불, 타령이 주를 이루고 있다. 춤사위는 주모가 음악에 맞추어 엉덩이를 좌우로 흔들며 추는 꽁닭춤, 마당쇠가 추는 깨금춤, 양반은 양팔위 배김사위, 양팔 젖기사위, 배김사위가 있고, 색시는 일자 사위· 낯가림 사위, 태극선 사위, 연풍대 사위, 한삼모아뿌림 사위 등 역에 맞는 다양한 춤사위들이 등장한다.

    가야금에 일가견이 있는 정행금 선생.
    가야금에 일가견이 있는 정행금 선생.

    선생의 자택 벽면에 걸린 가야금이 예사롭지가 않아 누구에게 배웠는지 묻자 가야금의 대가들인 김취란, 황병주 선생께 배웠으며 제자들을 모아 지도한 적이 있다고 한다.

    젊었을 때 사진을 보고 “미인 소리를 들었을 것 같다”고 하자, 시원하게 웃으며 “내가 젊었을 때 한 인물했다”며 부정하지 않았다. 90을 바라보는 연륜에 정신은 맑았고, 말은 마치 또랑또랑하게 책을 읽어 내려가는 것 같았다.

    조평래 소설가
    조평래 소설가

    조평래 (소설가)

    ※이 기사는 경남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원을 받았습니다.

  • < 경남신문의 콘텐츠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전재·크롤링·복사·재배포를 금합니다. >
  • ※ 관련기사
  •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플러스 카카오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