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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1월 28일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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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칼럼] 내 인생에서 가장 훌륭한 선택 - 장석주 (시인)

  • 기사입력 : 2022-11-24 21:0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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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려서부터 책을 좋아했다. 어린 시절 그토록 책에 탐닉한 것은 심오한 뜻이 있어서기보다는 책이 재미있어서였다. 책에서 나오는 교향(交響)의 장엄함 속에서 내 영혼은 더욱 깊고 굳세졌다고 믿는다. 청소년기에는 친구 집의 다락방에서 구한 책들을 읽고 ,전업 작가가 되어서 그 수입으로 생계를 해결하려는 원대한 계획을 세운 20대 초에는 시립도서관을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며 책을 읽었다.

    내 인생의 선택 중에서 가장 잘한 일은 책과 함께 한 삶이다. 내 행복의 조건은 책, 의자, 햇빛이다. 그것에 더해 사랑하는 사람들, 숲, 바다, 음악, 대나무, 모란, 작약이 있다면 이보다 더 좋은 삶은 없다고 믿었다. 책에는 가보지 못한 세계, 낯선 장소와 풍경들, 미지의 시간들이 있다. 책을 읽는 동안 나는 그 세계 속으로 뛰어들어 지적 모험을 시작한다.

    누군가는 책읽기를 ‘눈이 하는 정신 나간 짓’이라지만 아무리 소박하게 보더라도 책읽기는 항상 그 이상의 함의를 갖는다. 우리는 책을 통해 세상과 ‘나’에 대한 지식과 이해를 구하고, 교양과 지식을 갖춘 지성인으로 성장한다. 책을 읽는 사람은 뇌의 시각 피질이 달라지고 문자나 문자 패턴, 단어 등 시각적 이미지를 떠맡는 뇌의 세포망이 채워져서 지적 자극을 효율적으로 신경회로에 전달하는 능력을 갖춘다. 또한 마음이 고요한 가운데 기쁨을 느끼고, 옳고 그름에 대한 윤리적 감각이 발달한다. 한 마디로 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게 한다.

    공자는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라고 했다. 나는 그 말에 동의한다. 좋아하고 즐기는 것으로 이른 봄 종달새 소리, 모란과 작약 꽃들, 파초 잎에 떨어지는 빗소리, 벗들과의 담소, 흰눈 쌓인 겨울 아침의 햇빛 환한 것들을 꼽는다. 그밖에 고전음악을 듣고, 그림을 보는 것, 벗과 바둑을 두는 것을 좋아하는데, 내가 좋아하고 즐기는 것들 중에서 으뜸은 책읽기다.

    뼈가 약하고 살이 연할 때 나를 단련한 것은 책이고, 인생의 위기 때마다 나를 일으켜 세운 것도 책이다. 스스로 낙오자가 되어 시골로 내려와 쓸쓸한 살림을 꾸릴 때 힘과 용기를 준 것도 책이다. 평생을 책을 벗삼아 살았으니, 내가 읽은 책이 곧 내 우주였다고 말할 수 있다. 내게 다정함과 너그러움, 취향의 깨끗함, 미적 감수성, 올곧은 일에 늠름할 수 있는 용기가 손톱만큼이라도 있다면, 그건 다 책에서 얻은 것이다.

    내 인생의 큰 위기는 마흔 무렵에 왔다. 구속과 이혼을 겪고 시골로 들어왔다. 벗들은 멀어지고 생계 대책은 막막했다. 종일 저수지 물이나 바라보며 시간을 보냈다. 새벽마다 노자와 장자, 그리고 공자의 책을 읽었다. 그 책들을 끼고 살며 마음의 고요를 되찾았다. ‘마흔은 인생의 오후, 빛은 따뜻하고 그림자 길어져, 걸음을 느리게 잡아당기면 곧 펼쳐질 금빛 석양을 기대하면서 잠시 쉬어가도 좋은 시간. 아침부터 수고한 마음을 도닥거리고 어루만지면서 남은 시간에 무엇을 할 것인지 평온하고 지혜롭게 사유하라. 그런 이에게 오후는 길고 충만하다’.(졸저, ‘마흔의 서재’) 격류로 시작한 내 인생의 강은 어느덧 흐름이 느린 넓은 하류에 닿았다.

    세상을 크게 이롭게 한 바는 없지만 삶을 조촐하게 꾸려온 이의 자긍심마저 아예 없는 건 아니다. 스무 살에 등단해서 쉰 해 동안 시를 쓰고, 방송에 나가 책 얘기를 하며, 매체에 글들을 기고했다. 독자에서 편집자를 거쳐 저자로 살아오며 기쁜 일도 궂은일도 겪고, 여러 풍파를 견디고 넘어왔다. 그동안 책이 준 혜택은 일일이 꼽을 수 없을 만큼 무량하다. 책읽기 덕분에 내가 누구인지를 더 잘 인식하고, 영혼은 지식들과 융합하며 나는 사색하는 인간으로 성장했다. 나는 봉급과 수고에 매이지 않은 채 자유롭게 읽고 쓰며 밥벌이를 한 삶에 만족한다. 나는 ‘책읽는 인간’으로 일관하며 살아온 것을 기꺼워한다. 그걸 내 자존의 고갱이로 여기고, 그걸 오롯이 보람과 기쁨으로 여긴 것은 그게 바로 내가 갈망한 단 하나의 삶인 까닭이다.

    장석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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