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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5일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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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보며] ‘여성의 해자’ 빨래터가 사라지니…- 이병문(사천남해하동본부장)

  • 기사입력 : 2023-05-23 19:4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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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멀고도 가까운 것이 부모 자식 거리 같습니다. 뼈와 살을 받아 났지만, 잦은 핑계로 그 거리가 멀어지기 때문입니다. 나이 든 엄마와 아들의 거리는 참 애매합니다. 아버지가 계시지 않은 집은 더욱 그렇습니다.

    가정의 달. 드높은 하늘을 보면서 부모님을 생각합니다. 어머니께 말하지 못하고 터를 옮긴 지 여섯 달이 지났습니다. 방이 들녘 가운데 있어 창으로 드는 햇살의 간지러움에 잠을 깨고 방안까지 헤집고 들어온 달빛의 은은한 미소에 잠이 듭니다. 새소리, 흙내음, 비릿한 생명의 내음까지 맡으면서 농부가 종종걸음 치듯 일과를 시작합니다. 바다를 붉게 물들인 뒤 뉘엿뉘엿 땅거미 지는 저녁 해처럼 하루를 마칩니다.

    근처에 빨래터가 있어 예사롭지 않게 봅니다. 어머니를 보는 것 같아 더 그렇습니다. 오래전 군북역 인근에서 우윳빛 허벅지를 드러낸 채 옷가지를 치대던 아낙네를 본 적이 있습니다. 잊을 때쯤 핏빛 재개발 현수막이 나부끼던 창원시 마산회원구 석전동에서 바짝 마른 바닥에 자갈이 속살을 드러낸 빨래터도 ‘기억의 함지박’을 떠나지 않고 있습니다.

    숙소 인근 사천의 빨래터는 기억과 다릅니다. 시멘팅이 된 농업용 수로에 물막이를 덧댄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이른 시각, 집주인이나 단골로 짐작되는 아주머니가 빨래하고 코앞 논배미에서는 장화를 신은 남자가 삽으로 물꼬를 손보고 있습니다. 동네 아낙들이 세탁기에 바로 넣기 힘든 흙 묻은 옷 등을 초벌 빨래한답니다. 때론 물동이로 물을 퍼서 밭에 물을 주는데도 쓰인다고 말했습니다.

    어디든 빨래터는 금남(禁男)의 공간입니다. 젊거나 늙거나, 윗동네 아랫동네 여자들이 모두 모입니다. 이른 시각부터 달이 있는 깊은 저녁까지 시간도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빨래에 그치지 않습니다. 치대는 그 힘씀에 마음속 묵은 찌꺼기까지 털고 뱉어 물에 흘러 보냅니다. 목소리를 넘어갈 담장이 없으니 왁자지껄 떠들어도 무방합니다. 시부모, 시누이, 남편 등 시댁 식구뿐만 아니라 친정 식구, 자식, 이웃까지 모두 안주에 올립니다. 옆 동네 여편네 바람난 이야기에 소·돼지 새끼 밴 것부터 아이들 성적까지. 혹 뒷말이나 뒤탈로 한바탕 회오리바람이 불기도 합니다만 대부분은 그 자리에서 끝납니다. 입과 손으로 가족의 흠을 배설함으로써 가장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 곳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빨래터는 ‘한국 여성의 해자(垓子, Moat)’입니다.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성곽을 따라 파놓은 못인 해자처럼 남자의 진입을 막음으로써 여성들만의 지역이 만들어집니다. 서로를 앎으로써 교육, 육아 등 마을 공동체를 유지하고 지키기까지 합니다. 소풍 날짜를 아니, 엄마가 없거나 일이 생긴 집 아이의 도시락을 누가 챙길 것인지, 아니면 알아서 싸주거나 챙겨주는 그런 곳입니다.

    이제 빨래터는 사라지고 공동주택 한쪽에 세탁기가 그 역할을 맡았습니다. 표기는 공동주택이지만 공동체를 붕괴시킨 가장 역설적인 단어 공동주택. 이곳에선 모두 평등합니다. 말과 재잘거림뿐만 아니라 공동체까지 집어삼켰습니다. 공동이어야 할 주택은 가장 극적이면서 역설적인 방식으로 정 많던 사람들을 배반한 채 그 깊고 어두운 통속으로 그 많았던 계집애, 재잘거림, 아낙네의 웃음소리까지 쌩쌩 돌려 삼킵니다. 어머니의 눈물과 기쁨, 어머니에 대한 자식의 아스라한 기억까지 잡아먹었습니다.

    이병문(사천남해하동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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