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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6월 16일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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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미술을 빛낸 경남의 거장들] (9) 유택렬

원시미술서 찾은 ‘한국의 미’… 독창적 예술세계로 펼치다

  • 기사입력 : 2024-05-07 08: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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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함경남도서 태어나 사촌 유강열 도움으로 미술 공부
    6·25때 거제도 피란온 뒤 진해서 꾸준히 창작 활동
    흑백다방 열고 지역 예술가들과 문화예술 꽃피워

    서양화·한국화 넘나들며 독창적 조형성 구축 실험
    부산·대구·마산·프랑스 등서 잇단 개인전 열기도
    도립미술관, 올해 탄생 100주년 맞아 기획전시 예정


    유택렬(劉澤烈·1924~1999)은 6·25전쟁 때 월남하여 진해에 정착한 1954년부터 작고한 1999년까지 45년간 꾸준히 창작 활동을 이어간, 경남에 손꼽히는 작가다. 특히, 그는 시 낭송, 연극 공연, 음악회, 미술 전시 등 진해의 각종 문화행사를 해오던 ‘흑백다방’의 주인으로도 유명했다. 그러나 오늘날 그 시대를 함께 나누지 않은 세대에게는 막연하게 떠오르는 이름이기도 하다. 예술가 유택렬은 누구였을까.

    作品(Work), 1977년, 종이에 먹, 85×65.3㎝, 개인소장.
    作品(Work), 1977년, 종이에 먹, 85×65.3㎝, 개인소장.

    유택렬의 작품세계는 크게 서체의 회화성을 연구한 ‘부적(符籍)에서’, ‘작업(work)’ 시리즈 그리고 ‘돌멘(dolmen)’ 시리즈와 함께 오방색을 주조로 다양하게 변주하는 추상회화 시리즈(기하학 추상, 반추상, 비정형)를 중점적으로 볼 수 있다. 작업 세계 전체를 두고 보았을 때 작품의 주제와 양식 그리고 재료 등에 한계를 두지 않고 다양하게 표현했다는 것이 특징이다. 그는 서양화와 한국화를 넘나들며 자신만의 조형성을 구축하기 위해 끊임없이 실험했다. 한 작가가 45년간 이토록 다양하게 연구하고, 작업을 지속해 나갈 수 있었던 원동력과 예술적 자양분들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유택렬의 예술세계는 북에서의 유년 시절과 해방 전후, 6·25전쟁과 피란 등 한국 근현대사의 비극과 맞닿아 있기도 하다.

    부적에서, 1991년, 캔버스에 유채, 36.5x48㎝, 개인소장.
    부적에서, 1991년, 캔버스에 유채, 36.5x48㎝, 개인소장.

    유택렬은 1924년 함경남도 북청군 하거서면에서 아버지 유병추와 어머니 이석기춘의 3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나, 승마와 축구, 악기를 배우는 등 경제, 문화, 예술적으로 풍요롭게 자랐다. 1937년 하거서소학교를 졸업한 유택렬은 1943년 북청농업학교 재학시절 사촌 형 유강열의 도움으로 미술 공부를 시작했다. 그러던 중 1945년 일본군 징용 1기로 일본 해군에 강제징집되어 군 복무를 하게 되는데, 이것이 진해와의 첫 인연이었다. 1945년 해방 후 어렵게 고향으로 돌아간 유택렬은 유강열과 한묵, 이중섭 등과 교류하며 금강산으로 스케치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그렇게 다시 풍요로운 고향의 삶이 시작된 듯했지만 1950년 전쟁이 발발하고, 유택렬은 아버지와 동생 그리고 유강열과 함께 1·4후퇴 때 흥남부두에서 거제도로 피란을 오게 된다. 그 이후로 유택렬은 북에 남겨진 어머니와 어린 두 동생을 평생 보지 못한다.

    유택렬,작품60-L, 1960_캔버스에 유채, 97x162.2cm, 경남도립미술관 소장.
    유택렬, 작품60-L, 1960_캔버스에 유채, 97x162.2cm, 경남도립미술관 소장.
    유택렬, 돌멘(Dolmen), 1969, 캔버스에 유채, 91×73cm.
    유택렬, 돌멘(Dolmen), 1969, 캔버스에 유채, 91×73cm.

    유택렬의 어머니는 1900년생으로 한글에 능숙하여 편지를 쓸 정도로 신여성이기도 했지만, 그가 아플 때면 주술의 힘을 빌려 낫게 하려고도 했다. 어느 날 유택렬은 배가 너무 아팠는데, ‘먹물 아바이’로 불리는 노인이 만든 부적을 태운 먹물을 마시고 깨끗이 나았던 경험을 했다. 어린 시절의 이러한 경험은 유택렬 작품의 샤머니즘적 세계를 형성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유택렬은 처음부터 원시미술과 샤머니즘에서 우리 조형의 본질을 찾으려 했으며, 그 안에서 본인의 독자적인 조형언어를 구축해 낼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유택렬, 재, 1962, 캔버스에 유채, 53x41cm, 경남도립미술관 소장.
    유택렬, 재, 1962, 캔버스에 유채, 53x41cm, 경남도립미술관 소장.

    “나는 처음부터 원시 미술과 샤머니즘에서 우리 조형의 본질을 찾으려고 애썼다. 용에서부터 고인돌, 점, 단청, 부적, 불교미술 등은 내가 헤맨 분야들이다…. 샤머니즘의 본질은 살(煞)이며 부적이 동물적 본성의 소산이라면 추사의 작품들은 인간적 지성의 부적이다.” (1981년 작가노트 중에서)

    유택렬은 살아생전 자신의 작업에 대해 많은 글을 기록하지는 않았다. 위의 글은 1981년 7월 서울의 한국문화예술진흥원 미술회관에서 있었던 개인전의 평론을 위해 미술평론가 이경성에게 보낸 작가노트 중 일부이다. 유택렬은 당시 58세의 나이로 36년간 진행해 오던 자신의 작업 세계를 중앙화단에 제대로 알릴 수 있는 전시였다. 이후 부산(동방미술회관), 대구(맥향화랑), 마산(백자화랑)에서 연이어 개인전을 개최하였다. 그리고 10여 년 뒤, 1990년과 1991년에 두 차례 프랑스 파리(Etienne de Causans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갖기도 했다.

    유택렬, 무제, 1967, 캔버스에 유채, 50x60.6cm, 경남도립미술관 소장.
    유택렬, 무제, 1967, 캔버스에 유채, 50x60.6cm, 경남도립미술관 소장.
    유택렬 作品(Work) 1975 종이에 먹 담채 31.5×32.5cm.
    유택렬 作品(Work) 1975 종이에 먹 담채 31.5×32.5cm.

    2024년은 유택렬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는 의미 있는 해이다. 올해는 특히 경남도립미술관이 20주년이 되는 해로 ‘유택렬 탄생 100주년 기념’ 전시를 기획함으로써 유택렬의 예술세계를 심층 연구하고 더불어 흑백다방의 예술가 친구들과 함께 이루어 낸 경남문화예술사의 조각들을 맞춰보고자 한다. 월남 이후 제2의 고향인 진해를 평생 지켜온 유택렬 화백의 삶과 예술 속에서 그가 끌어내고자 했던 우리의 것, 한국미의 정수를 오늘의 눈으로 다시 보고자 한다.

    유택렬, 부적에서, 1961, 캔버스에 유채, 22.5x17cm, 개인소장.
    유택렬, 부적에서, 1961, 캔버스에 유채, 22.5x17cm, 개인소장.

    최옥경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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