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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1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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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향기II]맛, 그리고... 백합죽 (2)

  • 기사입력 : 2002-03-11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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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낮인데도 삼천포 어시장은 어둡다. 어둠을 코웃음치며 이겨내기에 충분
    한 촉수 높은 백열등 행렬.

    그 불빛 아래 놓인 좌판과 플라스틱 물통 안에서 춤추듯 퍼덕대는 활어들.
    어시장 좁은 골목마다 장사치 아낙들은 서로 자기네 것이 좋다는 주문을 손
    님들에게 걸어오고 그 넘쳐나는 소리에 극성스런 손짓도 장단을 맞춘다. 손
    님들은 이곳저곳을 기웃기웃. 한쪽에선 나무궤짝도 좋다 그것을 상삼아 갓
    친 회에 소줏잔을 기울이는 사람들. 삼천포항은 바다가 인간의 삶과 대면하
    는 경계(境界)인 동시에 통로다.

    인간인듯 자연인듯 삼천포 사람들은 바다와 인간의 중간 지점에서 싱싱
    한 해물을 날마다 중개하며 그렇게 살고 있다.

    시인 박재삼이 전통적 가락에 향토적 서정과 서민 생활의 고단함을 아름
    다운 시로 형상화 할 수 있었던 것은 삼천포항 때문이었다. 지난 97년 예순
    넷 영면할 때까지 삼천포 앞바다를 눈에 그린 그였다. 삼천포는 그의 문학
    의 토양이었기에 그가 살았던 팔포 앞바다 곁의 노산 공원에는 그의 시비
    가 있고 「천년의 바람」이 음각돼 있다. 해발 50m 높이에 자리한 노산 공
    원은 그래서 더욱 아늑한 느낌으로 다가오는데 이곳에 오르면 팔포 앞바다
    와 그곳에 자리한 목섬, 삼천포항의 감동을 자신의 마음에 음각할 수 있다.

    삼천포항의 삶이 꿈틀거리는 모습, 작은 배들이 들고남을 거듭하며 고기
    잡이에 나서는 생동감을 바라보면 「잘 나가다가 삼천포로 빠진다」는 말
    의 기원을 찾아 그 부정적 의미의 시비를 따지고픈 생각조차 든다.

    좀더 많이 얻기 위해 자연을 경쟁하듯 파괴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속
    칭 문명인들은 바다와 어울려 사는 것이 「자연」스러운 삼천포 자연인들
    의 모습 속에서 욕심 부리지 않는 소유가 무엇인지 찾을 수 있으리. 바다
    를 떠나지 못해서 매일 아침 바다로 떠나 늘 바다가 주는 만큼만 받아오는
    지극히 간단한 원리 속에서.

    국도를 따라 삼천포항을 나오면 넓은 바다와 교통하며 사는 사람들과는
    조금 다른 바다 사람들을 만난다.

    사천시 용현면 선진리. 이곳은 「백합죽」으로 유명하다. 「백합죽」은
    자연과 교감하며 사는 방식을 또 다른 형태로 보여 준다.

    이곳 사람들은 바람이 없으면 배를 타고 나가 백합을 잡는다. 바람이 많
    으면 배를 타지 않고 백합을 잡지 않는다. 물이 물러서면 그만큼 나아가 백
    합을 잡는다. 물이 밀려 들어오면 물이 들어서는 만큼 물러난다. 옛날에는
    백합이 많았다. 그래서 백합을 많이 먹었다. 지금은 백합이 귀해졌다. 그만
    큼 귀하게 먹는다. 바다가 주는 만큼 받고 그것만큼 누리는 자연의 삶을 산
    다.

    벚꽃으로 유명한 선진리성 아래에는 백합요리를 전문적으로 하는 횟집들
    이 바다 바닥에 백합 박혀있듯 20여곳이 모여 있다.

    선진리서 나서 자라고 십수년 전부터 백합죽을 만들어 온 강대웅씨(63.청
    정회가든)는 『한 이십년 전만해도 발에 밟히는 것이 모두 백합이었다』며
    『그냥 백합이 많으니까 국에도 넣고 구워도 먹고 죽도 해 먹은 것』이라
    고 말했다. 있으니까 먹은 것이다.

    지금의 각종 재료가 들어간 「체계적인」 백합죽은 20여년전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했다.

    백합죽은 찹쌀에 백합을 넣고 인삼, 대추, 잣, 밤, 마늘 등과 함께 끓인
    다. 영양이 풍부하고 소화도 잘돼 건강식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소금이나
    간장, 인공 조미료 등을 쓰지 않는다. 백합서 우러난 염분만으로 간하기 때
    문에 담백하다. 위에 부담이 없는 것은 물론이다. 숙취나 원기회복에 좋은
    것은 백합이 주는 넉넉한 또 하나의 덤이다.

    날씨가 따뜻해지면서 바다 밑 모래 속에 숨어있던 백합이 하나둘씩 고개
    를 디민다. 예로부터 「봄조개, 가을 낙지」라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조개
    류는 봄이 제철. 백합은 껍데기가 두껍고 둥근 테가 있으며 2개의 흑갈색
    띠가 비스듬하게 있다. 중국, 일본, 필리핀 등지에 분포하고 있으며 우리
    나라에서는 이 곳 남해에서 말고 서해안에서도 난다. 백합은 지역에 따라
    생합, 노랑조개라고 부른다.

    백합은 껍질의 테를 보면서 나이를 알 수 있는데 5~6년산이 가장 많이 좋
    다. 껍질에 광택이 나고 파르스름한 빛을 내는 것이 싱싱하다. 큰 것은 구
    이나 생회, 탕에 쓰이고 작은 것은 죽에 쓰인다.

    진사공단이 들어서고 진양호 방수로 백합이 떼죽음을 당하는 경우도 있었
    다. 인공이 자연을 위협하는 만큼 자연은 소중해진다. 그만큼 백합이 비싸
    졌다. 인공을 이끈 자가 결국 그 부담을 지게 된 셈이다. 인공의 위협조차
    자연으로 받아들이는 선진리 백합들은 오늘도 자랄 수 있는 만큼만 자란다.

    오랜 옛날 자연의 일부로 기능하던 시절의 그 본성이 가끔 발작을 일으
    켜 자연이 그리울 때 삼천포항을 들러 나오는 길에 사천 선진리 백합죽을
    만나보면 좋을 것이다.

    삼천포항은 인간과 바다를 이어주는 중개지(仲介地)고 사천 선진리 백합
    죽은 보다 자연과 친했던 과거와 그런 과거를 그리워할 수 밖에 없는 현재
    를 이어주는 한그릇의 작은 통로이기에.
    /글=권경훈기자 hoon519@knnews.co.kr/
    /사진=이준희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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