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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0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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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추억을 찾아 (8) 밀양 수산장

  • 기사입력 : 2005-04-25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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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밀양 수산장] - 봄향기 사람향기… 장꾼도 손님도 절로 흥이 나고  

       낙동강은 언제 봐도 아름답다. 특히 봄철 샛노란 유채꽃과 어우러진 풍광은 더욱 더 눈을 부시게 한다.
        밀양 수산장은 그런 곳에 아담하게 자리를 잡고 있다.

        수산교를 건너 오른편으로 접어들면서 장은 시작된다.
        버스주차장 앞부터 왕복 2차선 도로변으로 의류 보따리상. 강냉이. 과자상들이 한쪽변을 차지하고 늘어 서 있다.
        건너편에는 화분. 꽃. 묘목 등이 봄 향기를 풍긴다.

        남밀양농협 수산지소부터 본격적으로 좌판이 펼쳐져 있다. 오이. 가지. 미나리 등 싱싱한 야채들이 향긋함을 뽐낸다. 감자와 양파를 상자째로 가져와 팔고 있는 한 상인은 “오늘 장사 잘되네. 벌써 다 팔았는데 이제 가야겠다”면서 판을 접으려고 한다.
        너무 장사가 안돼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러고 보니 장날인데도 사람들이 그다지 많아 보이지 않는다.

        “지금 촌에 일이 많은 철이라 장사 안되예. 딸기·감자 수확해야지. 하우스농사 하는 사람들이 많아 그 일도 해야지. 아직 마수도 못했습니다.”
        건어물을 팔고 있는 한 상인이 하소연을 한다. 덧붙여 수산장의 고질적인 문제점들도 지적한다. ‘도시계획법’. ‘시장에 들어선 아파트’. ‘정부의 재래시장 정책’ 등 가득 찬 불만을 털어 놓는다.
        몇몇 상점을 빼고는 저마다 장사가 안된다고 아우성이다.

        한복점을 하고 있는 박금실(78)씨는 “한복은 설빔이나 혼수용으로 많이 쓰이는데 촌에 아이들도 없지. 결혼식도 없지 돈 구경한지 오래된다”고 말한다.
        게다가 주변에 큰 마트가 들어서고. 물건을 트럭에 싣고 시골까지 들어 가 팔아 버려 시장 상인들은 갈수록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그나마 시장 입구 참기름집은 북적북적거린다.
        할머니들이 순서를 기다리면서 주인이 내준 강냉이와 따뜻한 차를 마시고 있다.

        하남상회 신용범(50)씨는 “주로 짜놓은 것을 사가지고 가지만. 못미더운지 깨를 볶아 기름을 짜는 과정을 눈으로 확인하고 그 것을 사가는 할머니들도 더러 있다”고 한다.
        예전에는 직접 농사 지은 것을 가져와 참기름을 짜 가는 경우도 많았는데 이젠 거의 보기 힘들다고 한다.
        요즘은 웰빙 바람이 불어 다이어트 건강식으로 쓰기 위해 청국장을 갈아가는 손님과 들깨껍질을 벗겨가는 손님들이 많이 늘었다고 한다.

        그래도 장날인지라 이쪽저쪽에서 흥정하는 소리가 들린다.
        “할매 오늘 횡재했다.” “한벌 3만원이면 거저다 거저.”
        의류 보따리상 앞에서 한 할머니가 할아버지 옷을 골라 몸에 대어 본다. 따라나온 할아버지는 멋쩍은 듯 먼산만 쳐다보고 있다.

        몸빼바지. 잠바. 작업복 등 길가에 늘어놓은 옷가지들을 고르느라 아예 주저앉은 할머니도 보인다.
        5만원짜리가 3만원까지 내려간다.
        여기저기 안내를 해주던 정차출(73) 이장은 “예전에는 수산장에 가서 사람 잃어버리면 집에 가서 찾아야 한다고 할 정도로 사람들로 넘쳐나 흥이 절로 났는데 이렇게 변한 것이 안타깝다”고 이야기 한다. 이종훈기자 leejh@knnews.co.kr

        ★밀양 수산장은= 3일. 8일에 열린다. 창녕. 김해. 진영 등지의 중심지적 위치에 장이 자리잡고 있다. 수산교가 가설되기 전에는 나룻배를 이용한 장꾼들이 몰려온 곳이다. 수산장은 100여년 전 양동리에 장이 형성되어 오다 70년 전 현재 낙동강 제방 안쪽인 수산리 시서동 한가운데 자리잡아 5일장이 형성되었다. 그때는 낙동강변에 장이 섰다고 한다. 그 후 낙동강 제방이 현재 장이 서는 밖으로 구축되어 그대로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

        ★추억을 열며 본지 86년 8월 20일에 보도된 수산장= 곡물전으로 들어서면 부산의 소형트럭이 쌀을 담아 싣고 있다. 대도시의 소매상인들이 시장에 나온 쌀을 직접 구입. 트럭을 이용해 시장을 빠져 나간다.
        현재의 수산장= 곡물전은 근근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지만 옹기전은 없어져 버렸다.

        ★장터구경도 식후경= 수산장은 이름난 음식점은 없지만 한끼 식사하기에 손색이 없는 돼지국밥집이 있다. 식육점을 겸해서 하는 터라 고기 인심도 후하다. 뭉텅하게 썰어 놓은 고기살점의 씹히는 맛이 그만이다. 주인 김덕출(56)씨는 30여년간 식육점을 하다 최근에 국밥집을 시작했다고 한다.

        ★주변 볼거리 ▲수산제 수문(守山堤 水門)= 고대 삼한시대 농경문화의 유적으로서 벼농사를 위하여 축조된 제방의 수문이며 세조 13년에 경상도 체찰사 조석문이 부근 9개 고을의 장정을 동원하여 수축하고 국둔전을 만들었다. 김제의 벽골제. 제천의 의림지와 더불어 삼한시대의 대표적 저수지이다. 남전리에는 지석묘군(南田里 支石墓群)이 있다. (밀양시청 홈페이지 참조 http://www.miryang.go.kr)

        ★주말 열리는 장
        4월 30일= 진주 미천장. 진해 마천장. 사천 사천·곤양장. 김해 진례·불암장. 밀양 송백장. 양산 물금장. 의령 칠곡장. 함안 가야장. 창녕 영산장. 남해 무림장(이동). 하동 횡천·계천장. 산청 차황·단성장. 함양 마천·안의장. 합천 가야·초계장
        5월 1일= 창원 신촌·가술장. 진주 금곡·대곡장. 사천 완사장. 밀양 무안장. 의령 궁류장. 함안 대산장. 고성 고성장. 하동 화개·악양·고전장. 산청장. 거창장. 합천 묘산장

     

        뻥튀기·가위손 … 40년 장터 지킴이

        "우리가 없으면 장에 올 맛이 나긋나"

     

        장터 사람들 - 할머니 미용사 김영옥씨

        수산장 한켠에는 수십년은 족히 넘었을 것 같은 낡은 건물에 두어 평 정도 되는 미용실이 있다.
        삐죽하게 열린 문 사이의 모습이 웃음보를 자극한다. 머리에 수건을 두른 할머니. 머리를 손질하는 아낙들…. 들어 설 자리가 없을 정도로 붐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머리를 손질해주는 미용사도 할머니다.

        40년간 이 곳에서 미용업을 하고 있는 김영옥(62)씨.
        도시 일류 미용사 뺨칠 정도의 손놀림은 두말할 것도 없거니와 말하는 품세도 여간 아니다.

        “시집와서 시작했는데 이젠 손님도 나도 같이 늙어간다 아입니꺼.”
        대부분이 수십년 된 단골인 것이다.

        “말을 하지 않아도 자리에 앉으면 알아서 척척 손질해 줍니다”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 한 할머니가 너스레를 뜬다.
        눈빛만 봐도 머리를 어떻게 손질해 달라는지 알 수 있을 정도라고 한다.

        장날에만 이렇게 바쁘다. 그동안 미뤄뒀던 볼일을 보듯 장에 오면 꼭 들르는 곳이 이 미용실이다. 머리손질 뿐만 아니라 장터 사랑방 역할도 하기 때문이다.
        ‘대산댁 딸이 다음주에 시집 간다더라.’ ‘누구누구가 뭐 한다 하더라….’ 미주알고주알 수다 떨기에 여념이 없다.

        그런데 또 놀라운 모습이 연출된다. 머리손질을 마친 할머니가 그냥 나가는 것이다.
        “할머니들은 웬만하면 돈을 받지 않습니다. 일부러 봉사활동도 하러 나가는 세상인데 이 정도는 해야지요.”
        파마도 재료비만 받는다. 할머니들이 미안해서 슬쩍 몇천원 놓아두고 갈 때도 가끔 있다고 한다.

        마주보고 있는 이발소가 피해를 볼까 남자 손님은 받지 않는다. 그녀의 마음 씀씀이가 얼마나 고운지 엿보이는 대목이다.
        “아직 내 차례 멀었나.” 또 할머니들이 몰려온다.

        뻥튀기 할아버지 권경수씨
        어느 장엔들 뻥튀기가 없겠느냐마는 이 곳 수산장의 뻥튀기 할아버지도 고소한 삶을 살고 있다.
        고글 같이 생긴 까만 뿔테 안경을 쓰고 항상 웃고 있는 권경수(74)씨.

        마침 작업을 끝내고 달콤한 휴식을 취하고 있다.
        “내가 이 일을 근 40년간 하고 있지예.” “곡식 한되 튀기는데 30원 때부터니까 참 오래됐지예.”
        지금은 3천원이다. 5년 전부터 그렇게 받고 아직 올리지 못했다고 한다. 갈수록 경기가 좋지 않아서이다.

        그래도 이 일을 가지고 2남 1녀 공부와 출가를 다 시켰다고 한다. 대목에는 장날 구분없이 보름 정도 계속 튀긴다. 무시날(장날이 아닌 날)은 짐자전거에 기계를 싣고 촌으로 들어가 출장 뻥튀기까지도 했다고 하니 권씨의 부지런함이 어떠했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지금은 장날에만 나와서 소일거리나 용돈벌이를 하고 있다.

        권씨가 장날 하루 버는 수입은 약 5만원.
        20번 정도 튀기면 6만원이지만 대부분의 할머니들이 계산을 할 때 끙끙 앓는 소리를 낸다고 한다.
        차비가 모자란다는 둥. 손자 약을 사가지고 가야한다는 둥 별별 핑계를 대면 할아버지는 그냥 돈을 빼준다고 한다.

        “옛날에는 주로 손님들이 돈 대신 나무를 가져와서 뻥튀기를 해달라고 했지.” 한손으로 기계를 돌리고 다른 한손으로 나무를 패고 있으면 동네 꼬마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고 한다. 밑에 떨어진 튀밥을 주어먹기 위해서이다. 일부러 청소를 할 필요도 없었다고 한다.
        ‘그만큼 배가 고팠던 시절이 있었던가….’

        보리. 쌀. 콩. 옥수수. 땅콩부터 떡국까지 곡식은 전부 다 태워준다는 권씨.
        “자~뻥이요.” 우렁찬 목소리가 수산장에 울려 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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