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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재근의 우리땅 순례-경남 합천

  • 기사입력 : 2005-11-16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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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⑨ 땅과 불. 바람의 화음 경남 합천

      굽이굽이 산길마다 山寺의 숨결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경상도에는 바위로 된 산봉우리가 불꽃처럼 솟아있는 형태의 산이 없다. 오직 합천의 가야산만이 바위봉우리가 줄줄이 이어져 마치 불꽃이 공중으로 솟아오르는 듯하여 지극히 높고 수려하다” 라고 하였다. 명산에는 풍수 지리적으로 기가 세어 명당에 유명한 사찰이 있다고 한다. 삼라만상이 모두 잠들어 있는 새벽에 산사로 가는 길은 안개와 만나는 행복한 들판의 어울림이 있어 아름답다.

      가야산에 안긴 해인사… 약수암 국일암 등 15개 암자 차례로 반기고

      일주문·봉황문·해탈문 지나니 국내 최초·최고 비로자나 불상 미소

      매화산 중턱 청량사엔 신라말기 석조여래좌상·삼층석탑이 그대로

      [해인사 가는 길]
      해인사의 답사는 가야산의 암봉이 겹겹으로 보이는 야로면에서 노랗게 물들어 떨어지는 은행 나뭇잎을 만나는 것부터 시작된다. 절은 계곡이 있어 윤기가 돌고 계곡은 절이 있어 빛난다. 홍류동 십리 계곡으로 들어서면 울창한 아름드리 소나무 숲에 매료된다.  그런데 가슴 시리도록 아름다운 우리나라 소나무가 재선충에 시달리고 있어 멸종되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말도 안 되는 소식이 들려온다. 주위의 송림 사이로 흐르는 물이 기암괴석에 부딪히는 소리는 고운 최치원 선생의 귀를 먹게 했다 하며. 선생이 갓과 신만 남겨두고. 신선이 되어 사라졌다는 전설을 말해주듯 농산정과 시구를 새겨놓은 큰 바위가 있다.

      계곡 중간 지점에 만들어 놓은 현대식 석불과 석탑은 홍류동 경관과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계곡을 거슬러 해인사로 오르는 길은 처음에는 필시 오솔길이었을 것이나. 자동차 도로를 만들면서 아스팔트길로 만들어 걸어가는 사람들의 오솔길은 아예 없애 버렸다. 그러나 주차장과 매표소 부근에서 해인사 경내로 이어지는 도로는 보행자와 자동차를 분리하여 걸어가는 사람들이 풋풋한 산죽 향기와 정자에서 쉬어 가는 즐거움을 느끼도록 배려한 해인사 스님들의 넉넉한 마음이 묻어난다.

      [해인사]
      세계문화유산 및 국보 보물 등 70여 점의 유물이 산재한 해인사의 유명세는 쓸 말이 없을 정도로 많이 알려져 있다. 해인사를 품고 있는 가야산 산내 암자는 15개가 있는데. 암자를 찾아가는 길이야말로 큰절에서 만나는 번잡함이 없어 고즈넉한 아름다움으로 답사를 할 수 있다.(사진 : 해인사 일주문)

      보일 듯 말 듯 돌아가는 길을 따라 오르다 보면 약수암. 국일암. 지족암. 희랑대. 백련암 등이 손짓을 한다. 일주문 앞을 지나쳐서 석종형 모양에 홍제교라고 써놓은 다리를 건너면 유서 깊은 홍제암이다. 홍제암은 임진왜란이 끝난 뒤에 이곳에 은거하던 사명대사가 광해군 2년에 속세 나이 예순일곱으로 입적하였는데. 광해군은 스님의 열반을 애도하여 자통홍제존자(慈統弘濟尊者)라는 익호를 내리고 이곳에 스님의 비를 세웠다. 그 뒤로부터 스님의 익호를 따라 이 암자를 홍제암이라 하였고. 뒤편 언덕배기에는 평범하면서 명문이 없는 사명대사의 석종형 부도가 있다.

      발걸음을 옮겨 해인사 본사로 향했다. 일주문 입구에는 예전에는 연못이 있어 분수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무지개를 그리곤 했는데 지금은 없어져 버려 아쉽다. 해인사 일주문의 정면에 걸려있는 伽倻山海印寺(가야산해인사)의 편액은 일제 강점기에 글씨로 꽤나 이름을 날렸던 근대기의 서예가였던 해강 김규진(海岡 金圭鎭. 1868~1933)이 쓴 것이다.

      일주문을 지나 쭉 뻗은 전나무가 도열하듯이 서있는 흙 길을 잠시 걸으면 두 번째 문인 봉황문이다. 이 문은 사천왕상이 모셔져 있어 천왕문이라고도 불린다. 봉황문을 나서면 제3문인 해탈문이다. 일반 사찰의 불이문에 해당하는 곳으로 완전한 불법의 세계는 주·객. 세간과 출세간. 선과 악. 옳고 그름. 나고 죽음 등 대립하는 상대적인 것들을 초탈한 불이법문의 세계로 나아감을 뜻한다.

      지난 6월 법보전에 있는 쌍둥이 비로자나 불상의 개금불사를 위해 복장유물을 개봉하였다. 확인해 본 결과 9세기 통일신라 목조불상으로 서기 883년 제작된 국내 최초. 최고 비로자나불상이다. 보경당에서는 내달 8일까지 100일 친견 대법회가 열리고 있어 옻칠을 한 비로자나 불상의 은은하고 자비로운 미소를 볼 수 있다.

      종각에서는 젊은 스님이 웅장한 법고와 범종을 쳐서 사시(중식)를 알리고 있었다. 절 집에서 식사를 해보는 것도 일반인에게는 특별한 체험이다. 쌀밥과 미역국. 호박나물. 콩나물. 총각김치로 차려놓은 식사는 정갈하고 담백하다. 스님 50인분과 일반신도 100명분의 식사를 준비한다는 해인사의 공양간 출입문에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출입을 금지하는 문구가 붙어 있다.

      돌계단을 따라 대적광전을 뒤로 하고 고려 팔만대장경이 보존되고 있는 장경판전으로 갔다. 관리를 맡고 있는 분에게 화재 예방에 대한 시설을 물어보니 걱정을 안 해도 된다고 했다. 팔만대장경은 우리 민족의 자존심이다. 6·25당시 폭격으로 한 줌의 재로 사라질 뻔했던 팔만대장경을 지켜낸 두 군인 장지량 중령과 김영환 대령이 있었다. 당시의 상황으로는 어려운 폭격 명령을 거부하고 팔만대장경을 지켜낸 두 분의 이름이 팔만대장경과 함께 우리 모두에게 오래도록 기억되었으면 한다.

      [청량사]
      해인사를 나와 홍류동 계곡을 벗어나서 가야면 황산2구에서 등산로를 따라 오리쯤 가면 매화산 중턱에 청량사가 있다. 해가 중천에 떠 점심시간을 넘겼는데도 비지땀을 흘리며 산을 오르는 사람들이 많아 등산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자동차를 타고 가는 내 자신이 송구스러웠다.

      신라 말기 옛 절의 자취는 찾아보기 어렵고 여러 해 불사를 하여 깨끗함이 살아있지만. 실망할 필요는 없다. 대웅전에는 손 모양이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는 석조여래좌상이 완전한 모습으로 있고. 앞마당에 있는 삼층석탑과 석등이 엄연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석등 옆 요사채 마당에 있는 주렁주렁 매달린 붉은 홍시를 대나무 장대로 따먹어도 스님은 온화한 미소만 보낸다. 지금은 아이들 군것질거리도 안 되는 홍시를 들고 먼 비슬산이 가깝게 다가오는 툭 트인 풍광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답답한 마음까지 툭 트여지는 것 같다.

      [월광사터 동서삼층석탑]
      청량사에서 내려서면 야로면 월광리. 대가야의 마지막 왕 또는 태자로 전해지는 월광태자가 신라에 저항하여 싸우다 전사하였는데. 최후의 싸움터가 지금의 월광사 터라고 전해온다. 쌍탑 후면에 월광태자와는 동떨어진 분위기의 절집이 대신 자리하고 있고. 옆에는 작자의 이름이 없는 ‘월광사지’ 라는 제목의 ‘아득한 풍경 소리 어느 시절 무너지고 태자가 놀던 달빛 쌍탑 위에 물이 들어 모듬내 맑은 물줄기 새 아침을 열었네’ 라고 시가 돌판에 새겨져 일주문을 대신하고 있었다. 쌍탑 사이에 있는 무덤은 명당이라고 조상을 모셨을까? 월광사지 쌍탑을 찾아와서 바라보는 사람마다 안타까운 마음을 나타내고 있다.

      [합천 박물관]
      답사 길에 마음이 따뜻한 사람을 만나는 것은 늘 행복한 여행이다. 굽이굽이 돌아드는 산길 100리를 한걸음에 달려 합천군 쌍책면 성산리에 있는 합천박물관으로 답사 길을 재촉했다. 우리 답사회 제100차 기행 때 합천고등학교에서 시청각실을 기꺼이 빌려주어 ‘불상의 변천’에 대하여 강의를 해주었던 조원영(42) 학예사가 반갑게 맞이하여 주었다. 합천 답사의 첫걸음은 합천의 가야 왕국 다라국을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합천박물관을 찾아보아야 한다. 박물관 뒤쪽에 있는 옥전고분군과 인연이 깊은 류영기(66) 문화유산해설사가 있어 합천 길의 즐거움은 배가되었다.

      [맛집]
      ▲삼가식육식당(☎ 933-8947): 삼가면 일부리 (쇠고기구이 1인분 1만원)
      ▲합천호토속식당(☎ 934-1138): 봉산면 김봉리 (빠가사리매운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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