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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2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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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암논술 주제별 논술강좌] (1) 생태적 패러다임

  • 기사입력 : 2006-10-18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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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논술에서 출제되는 많은 논제는 생태와 문명 간의 갈등에 대해 고민해볼 것을 제안한다.

    생태적 패러다임과 인간중심주의

    생태적 패러다임은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하나의 해결책을 제시해줄 수 있을 것이다. 생태적 패러다임의 영역에서 말하는 관계성과 상호연관성. 그리고 다양성을 바탕에 둔 전체성 등은 환경적 위험으로 가득 찬 이 세상에 내려진 동아줄처럼 보인다.

    근대과학이 가져온 이분법과 그에 따른 어느 한 쪽의 일방적 중심주의.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위해 다른 것을 종속시키고 지배하는 것을 합리화하는 환원주의적 논리들을 비판하고 그에 따른 대안들을 찾아나가려는 생태주의자들의 논의에서 우리가 성찰해야 할 지점을 살펴보면서 대표적인 논제를 풀어나가도록 하자.


    그 생태적 동아줄이 위험사회를 구원할 튼튼한 동아줄이 될지 아니면 또 다른 시행착오를 요구하는 썩은 동아줄이 될지 스스로 판단해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


    [2003학년도 경희대 정시 인문계열 논술고사]

    <문제> 다음 지문들은 현대문명이 당면하고 있는 주요 문제와 그 해결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제시된 글들을 바탕으로 이 주제에 관하여 자신의 견해를 논술하시오. (1300자 이상 1400자 이내)

    <가> A convergence of problems has lead to the “environmental crisis.” These include the fact that there is no “new land” available for human exploitation. Human population has continued to grow unsustainably. The pace of technological change continues to disrupt the lives of hundreds of millions of people. Globalization continues to disrupt the economic security of billions of people. Global warming. acid rain. destruction of the ozone layer and other effects of industrial civilization undermine the integrity of natural systems across the planet. In the face of such a crisis. radical environmentalists have argued that mild reforms in public policy and practices are basically useless. Deep changes in society require a paradigm shift from the dominant modern paradigm of industrial civilization to a “new environmental paradigm” or “new ecological paradigm.” (Bill Devall. ‘The Deep. Long-Range Ecology Movement’)

    <나> Deep ecologists put a reign on human exploitation of natural “resources” except to satisfy vital needs. Thus. the use of a field by an African tribe to grow grain for survival is an example of a vital need whereas the conversion of a swamp to an exclusive golf course would not. Rest assured that much of the mining. harvesting. and development of our technological age would not meet the vital needs requirement of this principle. Rather than being concerned about how to raise automobile production. this ethic would be interested in solving the problem of human mobility in a way that would not require the disruption of highways. roads. and parking lots. It rebels against Peter Drucker‘s industrialist world view: “Before it is possessed and used. every plant is a weed and every mineral is just another rock.” (Thomas Berry. ’The Viable Human‘)
    주) deep ecologists: 근본 생태주의자

    <다> 근대 이후 주류 경제학에서는 인간의 욕망은 무한한 것이라고 전제를 하고. 그 무한한 욕망을 어떻게 하면 많이 충족시킬 수 있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따라서 소비가 경제활동의 궁극적인 목적이라고 인식하고. 생산요소들은 소비를 통한 욕망 충족의 수단으로만 생각한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불교적 관점에서 생각한다면 경제활동의 목적이 최대의 소비가 아니라 적정 규모의 소비로써 인간 사회의 복지를 극대화하는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주류 경제학에서는 인간의 욕망은 가치 중립적이라고 가정하고. 소비를 통해서 이 욕망을 충족시켜 줌으로써 인간의 행복이 달성된다고 본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인간의 욕망을 두 가지로 나누어서 생각한다. 하나는 인간이 생존을 유지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욕망으로 chanda라고 불리는데. 이는 가치 중립적인 또는 좋은 의미의 욕망이다. 이를 ‘선욕(善欲)’이라고 한다. 다른 하나의 욕망은 흔히 ‘갈애(渴愛)’라고 번역이 되는 tanha이다. 갈애는 인간의 생존을 위해서 또는 생활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지나친 욕망을 말한다. 갈애는 주로 순간적으로는 인간에게 육체적 또는 정신적 만족을 줄 수 있을지 모르나 궁극적으로는 우리의 정신과 육체를 해치는 결과를 가져오는 욕망이다.

    인간의 욕망을 이렇게 선욕과 갈애로 구분하여 인식하게 되면 경제학에서처럼 반드시 소비를 통해서 욕망을 충족시키고 이 욕망 충족을 통해서 행복이 얻어진다고 보기가 어렵게 된다. 오히려 소비의 증대가 아니라 적절한 소비를 통해서 또는 갈애를 줄이거나 아예 소멸시킴으로써 진정한 행복(福祉. well-being)을 얻을 수가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소비자의 효용체계나 가치체계를 단순히 물질적 소비에만 주로 의존하는 전통적인 경제학에서의 모형보다는 훨씬 더 발전되고 현실에 가까운 이론의 전개를 기대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정기문. ‘불교의 욕망관과 경제문제의 인식’. 『불교평론』9호 참고)


    # 출제 배경:

    이 문제는 환경문제를 다루고 있다.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를 정복과 피착취의 관계로 간주하고 그 문제에 대한 성찰을 요구하는 것은 지금 어쩌면 당연한 것으로 생각될지도 모른다. 즉. 인간은 자연과 유리되었고. 인간은 자연을 쉼 없이 정복하고 착취해왔고. 그런 과정에서 물질적 풍요로움을 획득할 수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개인의 삶은 팍팍해지고 인류는 자신이 저지른 행위에 스스로 두려움을 느끼게 되었다는 것이다.

    환경문제가 지금의 인류에게 해결해야 하는 하나의 과제로 제기되게 된 배경에는 근대적 세계관 자체에 대한 성찰이 놓여 있다. ‘위험사회’의 관점에서 보면 환경문제는 근대적 세계관이 배출해낸 최대의 위험 중의 하나인 셈이다. 그렇기에 환경문제는 단순히 우리 자손들이 물을 먹지 못한다거나 오존층에 구멍이 났으니 냉장고와 무스를 쓰지 말자는 등이 해결책은 아닐 것이다. 환경 운동과 생태이론이 대표적인 탈근대 이론으로서 여성 운동이나 소수민족의 권리 운동과 같은 변혁 이론과 끊임없이 접점을 만들어가고 있는 것은 바로 근대에 대한 반성을 그 속에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 문제에 접근하기:

    이 문제는 현대 문명이 당면하고 있는 환경 혹은 생태 문제에 대한 학생들의 생각을 묻고 있는 것이다. 교과서에까지도 ‘지속 가능한 개발’을 주요 개념으로 하는 글이 실려 있을 정도이니(과학 기술은 환경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가?). 논술에서 문제로 출제되기는 참으로 좋은 주제인 셈이다. 뿐만 아니라 환경문제는 과학 기술이라는 보다 넓은 주제에 포함될 수 있고. 그래서 기술 발전의 전제와 방향에 대한 학생들의 평소 생각까지 포괄해서 물을 수 있으니 더욱 그 중요성이 증대된다. 그러므로 이 문제 역시 단순히 환경문제에 대해서만 언급하고 그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만으로는 뭔가 모자라는 느낌이 든다. 제시문에서 환경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에 대해 나름대로의 진단을 내리고 있으므로. 학생들은 제시문에서 주어진 대로 환경문제의 본질적인 원인을 짚어보는 과정을 거쳐야 할 것이다.


    거기다 해결 방안에 대해서도 제시문이 암시하고 있는 방향을 따라갈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문제와 대안이 제시문에서 주어지는 형태의 문제는. 학생들이 제시문을 꼼꼼하게 독해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근대사회에서 발생하는 여러 가지 문제의 원인을 근본적인 차원에서 점검해낼 수 있는가를 묻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제시문에 답안의 기본적인 구성이 다 담겨져 있는 경우의 문제를 만났을 때는 일단 그것을 답안의 기본적인 구성으로 삼을 필요가 있다. 만약 자기 나름대로 구성을 새로 짜거나 추가하고 싶은 내용이 있다면 제시문의 내용들을 충분히 언급해 준 이후에 다루어 주어야만 한다. 그 경우에 학생들이 어떤 방식으로 환경문제의 원인에 접근하느냐. 더 나아가 환경문제로 대표되는 현대사회의 각종의 위험들에 대해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내용이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이 논제에서는 문제의 원인을 근대의 동인(動因) 중 하나였던 경제학이 전제하고 있는 것에서 찾았는데. 그것은 욕망의 무한성을 긍정하는 태도이다. 뿐만 아니라 경제학은 상품의 가장 근본적인 구성물에 대한 고려 없이 가르치고 배우는 학문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경제학에서는 논 한 마지기에서 나오는 쌀 10가마의 가치를 측정하는 전문가는 존재하지만 그 과정에서 제거되는 표토와 주변 생태계에 대한 손상. 비료에서 나오는 독소가 강과 바다에 미치는 영향. 제초제와 살충제의 대량 생산이 가져오는 환경적 손실을 측정할 방법은 고려 대상에서 제외된다. 그것은 경제학적 주체가 자연을 단지 자원으로만 간주하고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필연적인 결과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의 거대한 세계관을 구성하고 있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하나의 대안은 경제학이 전제하고 있는 무한한 욕망의 개념을 대체할 불교적 욕망 구분법이 될 수 있다.

    # 근대적 시공간의 변화:

     여기에서 더 나아가 제시문에서 제기하고 있는 세계관의 변화라는 개념은 환경문제. 조금 더 크게 보면 현대사회가 처한 여러 위험 중에서도 과학 기술과 관련된 문제를 다루는 데 확실히 핵심적인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우리는 과학 기술의 발전이 가져온 공간에 대한 인식의 변화에 주목해볼 수도 있다.


    하이네는 철도를 화약과 인쇄술 이래로 인류에게 가장 커다란 변화를 가져오고. 삶의 색채와 형태를 바꾸어 놓은 숙명적인 사건이라고 불렀다. 나아가 그는 철도와 기차라는 근대 과학의 발명품 때문에 우리의 직관 방식과 표상에 어떤 변화가 생겨날 것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말하자면 시간과 공간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들이 흔들리게 되었다는 것인데. ‘철도에 의한 공간 살해’라는 표현으로 이를 지적했다.


    서울에서 3시간 반 만에 대전까지. 그리고 같은 시간 내에 함경도까지 여행할 수 있게 되고. 그 노선들이 의주와 북경을 지나 모스크바까지 연결되고 또 그곳의 철도들과 연결된다면 그야말로 철도 이외의 모든 공간은 사라져 버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지적한 셈이다. 그렇게 볼 때 철도는 한편으로 이제까지 마음대로 할 수 없었던 새로운 공간을 열어 놓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 사이의 공간을 없애고 만 것이다. 그래서 기차의 창을 통해 보는 한반도는 그 공간이 지닌 심층적인 의미를 완전히 상실하고 만다.

    그것은 기차를 중심으로 빙 둘러서 있으며. 어디나 채색된 평평하고 동일한 파노라마 세계의 일부가 되어 버리고 만 것이다. 기술 문명 전 시대의 시각적 인식에 존재하던 깊이는 철도가 가져다 준 속도로 인해 가까운 곳과 먼 곳의 의미를 상실해버리고 말았다. 공간에 대한 인식이 사라져 버리고 만 셈인데. 그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전 세계의 공간을 지배하고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키지만. 실제로는 아무 것도 알 수 없게 만든 것과 마찬가지이다.


    우리의 일상적인 삶 역시 이와 정확히 합치한다. 새만금 간척지니. 브라질의 원시림이니 아무리 언론에서 떠들어보았자. 그 공간이 본래 내포하고 있는 깊이와 의미는 우리에게 전혀 와 닿지 않는 것이다. 남의 이야기. 남의 일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무관심 훨씬 이전에 이미 철도에 의한 공간의 살해는 이루어져 있었다.


    # 인간중심주의의 극복:

     근대 과학이 발전할 수 있었던 전제는 인간의 이성이다. 이성의 힘으로 세계의 구성 원리를 파악하고자 하는 소망이 물리학을 발전시키게 된 것이다. 외부의 물질세계를 그저 대상의 차원으로 전락시키고 만 근대 과학은 그렇기에 도저한 인간중심주의를 그 배면에 깔고 있을 수밖에 없다.

    말하자면 근대 이후 인간과 자연은 언제나 이분법적으로 나뉘어 있었고. 근대적 인간이 대상인 자연과 관계를 맺는 방식은 지배-피지배 관계에 기초한 것이었다는 뜻이다. 이러한 이분법과 지배-피지배 관계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서구인과 비서구인. 남성과 여성. 자본가와 노동자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로 파생되어갔다.

    우리는 환경 문제를 비롯한 수많은 근대적 문제의 원인을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우리에게 자연은 외부에 속해 있는 환경에 불과한 것이기에. 언제나 그것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눈앞의 문제를 먼저 해결한 이후의 일이 되어온 것이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인간중심적인 뉘앙스를 띠는 환경이라는 용어를 폐기하고 인간을 그 속에 내포한 생태라는 개념을 쓰자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렇게 본다면 제시문이 제기하는 문제의 원인 이외에 근대적 자연관 자체를 원인으로 제시하는 것 역시 가능한 하나의 대안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쓴다고 하더라도 일단 제시문의 내용은 충분히 다루어져야 한다는 점을 잊지 않도록 하자. /경남초암논술아카데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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