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  |   유튜브  |   facebook  |   newsstand  |   지면보기   |  
2024년 04월 17일 (수)
전체메뉴

[초암논술 강좌] (2) 미래사회의 노동과 인간

  • 기사입력 : 2006-11-08 00:00:00
  •   
  • 사회구조 속에서 파악하는 노동의 의미

    <2003학년도 정시 서강대 논술문 >
    <논제>
    제시문 [가]. [나]를 활용해 노동과 관련한 [다]의 입장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논술하라. (1600자 내외로 쓰시오)

    [가-1]
    낙원에서는 노동을 한다는 것이 고된 것이라기보다는 그저 즐겁기만 했을 것이다. 인간의 노동 덕분에. 하느님이 창조하신 바는 자라나고 성숙해져 풍부한 결실을 맺게 되는 것이었다. 하느님이 인간을 낙원에 들여보내신 것은 일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노동하는 사람은 한 그루의 나무를 바라보면서 그의 시선을 창조계 전체로 옮겨 간다. 정말 세계는 한 그루 나무와 같다. 세계에는 섭리가 이중으로 작용한다. 자연에 맡겨진 부분과 의지에 맡겨진 부분이 이중으로 작용한다. 그 모두가 인간이 교육을 받는 표지이고. 교양을 쌓는 밭이며. 인간이 발휘할 기술인 것이다. 이제 의미가 밝혀진다. 하느님이 인간을 낙원에 들여보내신 것은 일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거기서 농사를 지으라는 뜻에서였다. 그것은 노예가 하는 강제 노역이 아니라 자유 의지에서 우러난 지성인의 작업이었다. 이런 일에 종사하는 것처럼 순진무구한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인간이 그것을 지혜롭고 현명하게 수행한다면 노동보다 고상하고 그보다 성취적인 일이 또 있겠는가? ― 아우구스티누스. ≪창세기 축자 해석≫에서

    [가-2]
    23. ① 사람은 누구나 일하고 직업을 자유롭게 선택하고 공정하고 유리한 노동 조건을 누리고 실업에 대해 보호받을 권리를 가진다. ② 사람은 누구나 어떤 차별도 받지 않고 동일한 노동에 대해 동일한 보수를 받을 권리를 가진다. ③ 일하는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자신과 자기 가족에게 인간의 존엄성에 알맞은 생활을 보장해 주는 그리고 필요한 경우에는 다른 사회적 보호 수단으로 보충되는 공정하고 유리한 보수를 받을 권리를 가진다. ④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노동조합을 조직하고. 또 이에 가입할 권리를 가진다.
    24. 사람은 누구나 합리적인 노동시간 제한 및 정기적인 유급 휴가를 포함한. 휴식과 여가를 가질 권리를 가진다. ― <세계 인권선언> (1948년. 3차 유엔총회)

    [나-1]
    공장을 끼고 흐르는 작은 내를 건널 때는 숨을 쉬지 않았다. 시커먼 폐수 폐유가 그냥 흘렀다. 근로자들은 아침 일찍 공장으로 걸어 들어갔다. 저녁때 노동자들은 터벅터벅 걸어나왔다. 계속 조업 공장의 새벽 교대반원 얼굴에는 잠이 그대로 붙어 있었다. 공원들은 잠을 쫓기 위해 잠 안 오는 약을 먹고 일했다. 영국의 상태는 아주 끔찍했었던 모양이다. 로드함 공장에서는 어린 공원들이 정신을 차리게 하기 위해 채찍질을 했다는 기록을 나는 읽었다. 이 로드함 공장이 오히려 인간적이었다는 기록도 나는 읽었다.
    리턴 공장에서는 어린 공원들이 한 공기의 죽을 먹기 위해 서로 싸웠다. 성적 난행도 당했다. 공장 감독은 무서웠다. 공원들의 손목을 묶어 기계에 매달았다. 공원들의 이를 줄로 갈아 버릴 때도 있었다. 리턴 공장의 공원들은 겨울에도 거의 벌거벗고 일했다. 하루 열네 시간 노동은 보통이었다. 공장 주인은 노동자들이 시계를 갖는 것을 금했다. 하나밖에 없는 공장 표준 시계가 밤늦게까지 일을 하게 했다.
    이들 노동자와 가족들이 공장 주변에 빈민굴을 형성하고 살았다. 노동자들은 싸고 독한 술을 마셨다. 죽어서 천국에 간다는 복음만이 그들에게 위안을 주었다. 참혹한 생활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아편을 쓰는 사람도 있었다. 자식에게까지 쓰는 사람이 있었다. 공장 주인과 그의 가족들은 상점이 들어선 깨끗한 거리. 깨끗한 저택에서 살았다. 그들은 좋은 옷을 입고 맛있는 음식을 먹었다. 교외에 그들의 별장이 있었다. 신부는 그들을 위해 기도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된 영국의 노동자들은 공장을 습격했다. 그들이 제일 먼저 때려 부순 것은 기계였다. 프랑스의 철공장에서는 노동자들이 망치 소리에 맞추어 노래를 불렀다. 그 노래는 절망에서 나온 부르짖음이었다. ― 조세희. <잘못은 신에게도 있다>에서

    [나-2]
    오늘날 생산물만이 중시되고 그것을 만들어 낸 노동이 등한시된다는 것은 단지 상점이나 시장. 무역의 경우에 한하는 것은 아니다. 근대적인 공장 안에서도 노동자의 경우에는 사정이 전적으로 동일하다. 작업상의 협력이나 이해. 상호평가란 그야말로 고위층의 권한에 속할 뿐이다. 노동자 계층에 있어서 여러 부서와 여러 직무 사이에 형성된 관계란 다만 사물간의 관계일 뿐 인간 상호간의 관계는 아니다. 부품은 명칭과 형태. 원료가 기입된 쪽지가 붙여져 유통된다. 이 부품이야말로 바로 인간이며. 노동자는 다만 교환 가능한 부품이라고 생각될 수도 있을 것이다. 부품은 제조 명세서를 갖는다. 또 몇 개의 큰 공장의 경우처럼 노동자가 출근 시에 죄수같이 가슴에 번호를 단 사진이 붙어있는 신분증을 제시하지 않으면 안 될 경우. 그 신분 확인 절차는 가슴을 찌르며 고통을 주는 하나의 상징이 되는 것이다.
    사물이 인간의 역할을 하고 인간이 사물의 역할을 하는 것이야말로 악의 근원이다. 큰 공장은 물론이고 조그만 공장에서까지도 많은 남녀 노동자들은 명령에 의해 있는 힘을 다해 대충 1초마다 한 번씩 행하는 대여섯 개의 단순한 동작을 끊임없이 되풀이할 따름이다. 기계 작업은 마치 시계의 똑딱 소리처럼 끊임없이 계속된다. 이 경우 하나의 일이 끝나고 다른 일이 시작된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저 똑딱거리는 시계 소리의 기운 빠지는 듯한 단조로운 소리를 오랫동안 듣는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노릇이지만. 노동자는 자기 몸으로 그것을 감당하지 않으면 안 된다. ― 시몬느 베이유. ≪노동일기≫에서

    [다-1]
    우리는 노동이라는 말을 들으면 곧 채플린의 <모던타임스>나 르네 클레르의 <우리에게 자유를>을 연상합니다. 분명 그들의 이미지나 비판은 지난날 옳은 때가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전통적인 산업주의에만 적용될 수 있는 것으로서 오늘날 급속히 진화되고 있는 새로운 산업에는 들어맞지 않습니다. 분업화된 공장 노동이 얼마나 비참한 것이었는지는 잘 알려져 있으며. 그것은 오늘날에도 역시 비참합니다. 그러한 공장형의 노동은 오피스에도 들어와 개개의 노동자는 작은 반복 작업만을 되풀이함으로써 자기의 일이 전체에 이어진다는 자각을 하지 못하고. 자기 재량이나 창조력을 발휘할 기회도 가지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와 같은 직업을 보존하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노스탤지어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제까지의 ‘제2의 물결’산업에서는 공정을 분업화. 반복화해서 인간이 기계처럼 되어 일하는 것이 능률을 올리는 요령이었습니다. 이제 그런 일은 컴퓨터가 더 빠르게 잘해 주고. 위험한 작업은 로봇이 해 줍니다. 지금까지의 공정은 시대와 함께 채산성도 생산성도 떨어지고 있습니다. 변화를 촉진하는 조건은 갖추어진 셈입니다.
    ‘제 3의 물결’의 노동자는 더욱 독창적이고 더욱 지능적이라서 이제는 기계의 부속품이 아닙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기능과 특수 지식이 있는 인간입니다. 자기 전용의 연장 상자를 가지고 있었던 산업혁명 이전의 직업인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말하자면 ‘두뇌 노동자’는 기능과 정보가 가득히 들어 있는 ‘두뇌 도구 상자’를 가지고 있습니다. 미숙련 노동자가 갖지 못한 생산 수단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새로운 노동자는 자립한 직업인과 비슷하기는 하지만 아무하고나 교체가 가능한 조립 라인의 노동자와는 그 질이 다릅니다. 젊고. 교육수준도 높고. 반복 작업은 하지 않습니다. 자기에게 적합한 방법으로 일을 해 내기 때문에 상사의 잔소리를 싫어하고 항상 자기 주장을 지니고 있습니다. 애매한 공정이나 직제의 변화에도 꿈쩍하지 않습니다. 그들이야말로 새로운 노동력이며 그 수는 자꾸자꾸 늘어나고 있습니다. 경제가 ‘제2의 물결’에서 ‘제 3의 물결’로 옮겨짐에 따라 새로운 가치 체계가 생겨남과 함께 노동자의 기능도 새로워집니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것은 그와 정반대. 말하자면 ‘마르크스를 물구나무 세운 것’과 같습니다. 오늘날의 경제에서 흥성하는 부문은 수천 명에 이르는 노동자에 의한 동일화. 규격화된 반복 작업을 필요로 하고 있지 않습니다.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은 적응력과 독창력과 고학력을 갖춘. 개성적이라 해도 좋을 정도의 노동자입니다. ― 앨빈 토플러 ≪전망과 전제≫에서

    [다-2]
    미래의 노동은 자동화 시대의 ‘생활 배우기’를 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이것은 전기 테크놀로지에서 흔히 나타나는 패턴이다. 이것은 문화와 테크놀로지. 예술과 상업. 일과 여가라는 낡은 이분법을 없애 버린다. 단편화가 지배적이었던 기계시대에는 여가란 일이 없는 것. 또는 단순히 놀고 지내는 것이었지만. 전기시대에는 그 반대가 맞는 말이 된다. 정보시대가 모든 능력을 동시에 사용하는 것을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시대의 예술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열심히 대상에 관여함으로써 가장 한가하게 여가를 누리게 된다.
    현재의 노동력을 산업으로부터 철수시키려고 하는 이 자동화의 작용 때문에 학습 그 자체는 생산과 소비에서 중요한 것이 된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실업에 대한 불안은 어리석은 것이 된다. 이때 급료를 받아 가며 배우게 되는데. 이는 이미 지배적인 고용 형태가 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내에서 새로운 부(富)의 원천이 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사회 내에서 인간이 떠맡는 새로운 ‘역할’이다. 반면에 기계적인 구식 관념인 ‘직능’ 즉 ‘노동자’에게 주어진 단편화된 일이나 전문가적 직위와 같은 개념은 자동화 상황에서는 더 이상 의의를 가지지 못한다.
    자동제어기구의 전기 시대는 갑자기 사람들을. 앞선 기계시대의 기계적. 전문가적 노예 상태로부터 해방시킨다. 기계와 자동차가 말을 해방시켜서 오락의 세계 속으로 던져 넣은 것처럼. 자동화가 인간을 해방시키는 것이다. 우리는 그 해방에 대한 대가로. 내부의 자원을 이용해 스스로 고용을 창출해 내고 풍부한 상상력으로 사회에 참여해야 하는 부담을 갑자기 안게 되었다. 전기적 에너지는 작업이 이루어지는 장소나 작업의 종류와는 무관하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작업에서의 탈중심화와 다양성이라는 패턴을 형성한다. 예를 들면. 이것은 난롯불과 전깃불의 차이에서 분명히 나타나는 논리이다. 따스함과 빛을 찾아 난롯가나 촛불 주위로 모여든 사람들은 전깃불을 지급 받는 사람만큼 생각이나 과제를 자유롭게 추구하지는 못한다. 이처럼 자동화 속에 숨어 있는 사회적. 교육적 패턴은 자기 고용(self-employment)과 예술적 자율성의 패턴이다. 자동화가 세계적 규모의 획일화를 가져온다고 놀라 당황하는 것은. 이제는 이미 과거가 되어버린 기계적 규격화와 전문화의 미련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 마셜 맥루언. ≪미디어의 이해≫

    # 출제 배경

    이 문제는 노동에 관해 묻고 있다. 노동은 어째서 우리에게 고통스러운 것으로 여겨지는 것일까? 청년 실업의 문제가 우리 사회의 심각한 문제가 된 지 이미 오래고. 따라서 어떤 맥락에서건 자신의 꿈을 가지고 추구하면서 살아가기 힘든 시대에 우리는 노동의 문제를 새롭게 인식해야만 한다.
    인류의 역사는 노동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든. 자아실현을 위해서든 어느 한 순간도 노동하지 않고 살아온 적은 없다. 개인적인 차원에서 건. 종 전체의 차원에서건 인간의 삶은 연속적인 노동의 과정을 통해 구축되어 왔다. 따라서 인간이 살아가면서 노동이 어떤 의미를 갖고 어떤 조건 속에서 행해지는가에 따라. 노동은 인간 행복의 원천이 될 수도 있고 고통의 출발점이 될 수도 있다.

    결국 노동에 대한 고민은 인간 자신의 가장 핵심적인 고민이 될 수밖에 없으며 그런 관점에서 삶에 대한 인간의 태도와 깊은 관련을 맺지 않을 수 없다. 뿐만 아니라 결국 모든 노동은 사회적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노동의 의미와 조건을 사회 구조 속에서 파악해야 할 필요성도 제기된다. 그 과정에서 노동과 인간의 문제는 미래사회에 대한 전망과 직결된다.

    이번 논제는 이처럼 노동과 인간을 둘러싼 총체적인 고민을 담고 있다.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내용 역시 노동의 의미부터 시작해. 현대사회의 구조 속에서 노동은 어떠하며 미래 사회의 노동은 어떠해야 할 것인가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다. 그런 관점에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창세기 축자 해석≫. 3차 유엔총회에서 채택된 <세계인권선언〉. 조세희의 <잘못은 신에게도 있다〉. 시몬느 베이유의 ≪노동일기≫. 앨빈 토플러의 ≪전망과 전제≫ 그리고 마셜 맥루언의 ≪미디어의 이해≫에서 제시문이 발췌되었다.

    먼저 노동의 보편적 이해와 구체적 현실. 그리고 변화된 정보화 상황에서 노동에 대한 새로운 전망 등을 다룬 세 묶음의 제시문을 읽고. 노동의 문제를 점차적으로 확장해 사고하는 것이 우리들에게 요구된다. 특히 정보화사회에서 노동의 새로운 조건과 의미를 타진한 [다]의 입장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가]와 [나]에서 구체적 논거를 찾아 논술하도록 한 것은. 노동에 대한 평소의 견해를 단순하게 기술하는 것을 넘어 읽기와 쓰기 능력을 종합적으로 평가하기 위해서다.

    이 문제는 제시문을 정확히 읽어 내고. 읽기를 통해 발견한 내용과 비판적으로 대화하면서 주어진 물음에 대해 체계적으로 논리를 구성하는 능력을 요구하고 있다.
    최근의 논술 문제는 모두 하나의 주제에 대해 단일한 사고를 요구한다기보다는 그 문제에서 파생된 종합적 사고를 요구하고 있으므로 이번 기회를 통해 스스로를 단련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 인간과 노동에 대한 전망

    문제가 최종적으로 요구하는 것은 인간과 노동에 대한 자신의 전망이다. 제시문 분석이 큰 무리 없이 이루어졌다면 크게 보아 두 가지 방향에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할 수 있다.
    첫째는 제시문 <다>의 견해를 옹호하고. 둘째는 비판적 견해를 제시한다. 어떤 입장을 취하든 제시문 <가>. <나>의 입장을 근거로 활용하고 미래 사회에 대한 전망을 확고하게 제시할 수 있어야만 한다.
    기본적으로 산업사회에서 노동의 의미가 인간을 소외시키고 있다는 점에는 대부분 동의할 수 있다. 따라서 미래사회에 대한 전망을 어떻게 그리고 있는지가 인간과 노동의 관계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관해 서로 다른 입장을 제시하는 근거가 된다.

    만일 미래사회의 모습이 인간의 삶을 행복하게 한다는 것에 동의한다면 제시문 <다>의 견해를 옹호하는 입장을 취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반대의 경우라면 제시문 <다>의 주장을 반박하면서 현대산업사회와 마찬가지로 미래사회에서도 노동은 인간의 삶을 구속할 것이라는 점을 주장할 수 있다.
    물론. 제시문 <가>에서 노동이 천부적이라고 주장한 것과 달리 ‘인간은 반드시 노동해야 하는가’라는 반론을 통해 논의를 전개할 수도 있다. 즉. 노동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한 행위가 아니고. 사회의 강제에 의한 것이므로 본질적으로 노동하는 인간은 행복할 수 없다는 점에 주목하는 것이다.

    이를 근거로 정보화 사회에서 자동화 시스템은 인간을 노동으로부터 해방시킴으로써 궁극적인 행복을 누릴 수 있을 것이라는 주장도 가능하다. 다만 노동이 반드시 필요한지 아닌지를 지나치게 의식할 경우 제시문을 활용하라는 논제의 요구 사항을 벗어날 수 있다는 점을 유의하자.

    # 정보화 시스템과 인간노동

    이제까지 많은 미래학자들은 첨단기술을 바탕으로 한 정보화사회의 모습을 지나치게 긍정적인 관점에서 논의해 왔다. 그러나 첨단기술은 결국 인간 노동의 산물이라는 말을 문제를 해결할 때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제시문 <다> 역시 기존의 관점을 답습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사이버 맑스》의 저자 닉 다이어 위데포드(Nick Dyer Witheford)의 정보화 사회 비판은 의미 있다. 그는 북미지역의 사례를 예로 들며 탈산업주의 미래학은 자본주의에 맞서는 대중의 저항을 억누르기 위한 ‘계획’이라고 해석한다. 따라서 현대사회의 흐름에서 자연스럽게 추론되지 않는 제시문 <다>의 미래학은 그저 자본주의가 원하는 미래의 청사진을 보여 주는 미래학일 뿐이라고 비판한다.

    위데포드는 ‘기술이란 그 개발에 참여한 여러 사람들의 상반된 욕망이 서로 경쟁하며 만들어진 산물로서 모순된 잠재력을 갖고 있다’라는 맑스주의적 관점에서부터 고찰한다. 기술의 유용성이나 부정성은 결국 그 안에 내재된 잠재성을 둘러싼 인간들의 적대 관계와 투쟁 과정에서 결정된다고 말한다.
    그 예로 ‘사이버스페이스’의 등장 과정을 들 수 있다. 애초에 인터넷은 ‘아르파넷’이라는 군사 네트워크를 기반해 만들어졌다. 하지만 이것은 자율적으로 활동하던 해커들. 열정적인 프로그래머들. 과학에 취미를 지닌 사람들. 컴퓨터상의 불복종자들을 통해서 민주적이며 전 지구적인 커뮤니케이션 네트워크로 변화됐다.

    위데포드는 인터넷이라는 이 독특한 결과물을 ‘정보고속도로’를 통해 상업적으로 재점령하는 과정 속에서 디지털 기술의 민주적이면서·참여적인 잠재력이 발휘된 것이라 본다. 즉 ‘모순된 잠재성과 내재된 압력이 서로 경쟁하며 만들어진 것이 기술’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첨단기술의 등장을 무조건 환호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그 ‘원죄의 흔적’을 찾아가며 섣불리 첨단기술의 잠재성을 외면하는 것도 문제”라고 지적하며 첨단기술의 무궁한 잠재성에 주목한다. 정작 중요한 문제는 첨단기술 그 자체가 아니라 기술의 잠재성을 둘러싼 인간의 재구성과 재전유의 노력이라는 것이다.

    그는 자본이 점점 더 첨단기술을 노동도구와 소비재로 사용하고 첨단기술의 개발주기를 점점 더 가속화시킬수록. 간단히 말해 자본이 점점 더 첨단기술에 의존할수록 자본은 스스로 기초시설과 사용자를 늘릴 수밖에 없다는 점에 주목한다. 그에 따라 Peace-Net. Eco-Net. Conflict-Net 같은 전 세계의 진보적 뉴스그룹들. 그리고 다양한 사회운동들의 홈페이지들이 만들어진다.

    위데포드의 관점을 통해 이 문제를 바라본다면. 첨단 기술을 바탕으로 한 미래사회에 대한 전망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것을 무조건적으로 수용하거나 거부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첨단 기술의 잠재성을 어떻게 인간적으로 재전유해 대안적 공동체와 커뮤니케이션을 구축할 것인가야말로 인간과 노동의 관계를 새로운 관점에서 풀어 나가는 방법이 될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하도록 하자. <경남초암아카데미 제공>

  • < 경남신문의 콘텐츠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전재·크롤링·복사·재배포를 금합니다. >
  •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플러스 카카오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