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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0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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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암논술 주제별 강좌-3] 인간 소외

  • 기사입력 : 2006-12-20 07:5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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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양대 정시 논술 문제(2001학년도)

    [논제] (가)∼(다)는 현대인이 처한 상황을 보여 주고 있는 글이다. (가)∼(다)에서 그 양상을 분석해 내고. (라)를 바탕으로 현대인이 처한 상황에서 야기되는 문제점을 극복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하여 논술하시오.

    [제시문]
    (가)
    지난 몇 십 년 사이에 고객의 위상에 상당한 변화가 생겼다. 소매상점에서는 찾아오는 고객을 개인적으로 친절하게 대했다. 고객은 중요한 사람으로 대접받았고. 그의 일상까지도 상점의 주인과 함께 의논할 수 있었다. 물건을 사는 행위 그 자체에서 고객은 자기의 중요함과 품위를 느낄 수 있었다.
    오늘날 백화점의 경우. 고객은 우선 거대한 건물과 수많은 점원들과 잔뜩 진열된 상품에 의해 압도된다. 이 모든 것에 비해 그는 자기가 얼마나 보잘 것 없는 존재인가를 느끼게 된다. 백화점의 입장에서 보면. 인간으로서의 그는 아무런 중요성을 갖고 있지 않으며. 단지 ‘한 사람’의 고객일 뿐이다. 백화점은 고객을 놓치지 않으려고 하지만. 그는 단지 추상적인 고객으로서 대접받을 뿐이지 구체적인 고객으로서 중요시되지 않는다.
    이런 상태는 현대의 광고 방법에도 잘 드러난다. 거대한 현대 광고는 상품의 효용성을 강조하여 합리적으로 소비자를 설득하기보다는 감성에 호소하거나 호기심을 자극한다. 즉 같은 일을 몇 번이고 반복하거나. 사교계의 부인과 유명한 권투선수에게 특정 상표의 담배를 붙여 물게 함으로써 권위 있는 이미지를 생기게 한다든가. 아름다운 소녀의 성적인 자극을 내세워 비판력을 마비시키려고 한다든가. 어떤 셔츠나 비누를 삼으로써 뭔가 전 생애가 갑자기 변화하는 듯한 그런 공상을 자극하기도 한다.

    (나)
    지나간 두 세기 동안 기계적인 생활 수단이 전 세계적 규모로 보급되었다. 그러나 이로 인해 내면생활이 풍요로워지거나 예술 창작과 향유에 쓰여지는 시간적 여유가 많아지기는커녕 우리는 우리 자신이 기계화의 과정에 더욱 깊이 빠져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심지어 우리의 상상력까지도 그 대부분이 내발적(內發的)인 것이 되지 못한다. 우리의 상상력은 기계에 비끄러 매이거나. 라디오나 텔레비전의 도움 없이는 자체적 실재성을 보유할 아무런 힘도. 생존 능력도 갖지 못한다. 우리의 현재 상황을 17세기. 즉 기술면에서 비교적 원시적이던 그 시대의 상황과 비교해 보라. 그 당시 평범한 런던 시민들은 심지어 하인들을 뽑을 때에도 그가 저녁 시간에 벌어지는 가족음악회에 한몫 낄 수 있을 만한 목소리를 가지고 있느냐를 고려하기도 했다. 오늘날 우리는. 야외에서 기계의 도움 없이도 스스로 자유롭게 노래 부를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도 못하며. 휴대용 음향기기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귀를 기울이면서 강변을 거니는 사람들을 자주 본다.

    (다)
    우리는 복도에서 헤어져 사환이 지적해 준. 나란히 붙은 방 세 개에 각각 한 사람씩 들어갔다.
    “화투라도 사다가 놉시다.”
    헤어지기 전에 내가 말했지만.
    “난 아주 피곤합니다. 하시고 싶으면 두 분이나 하세요.”
    하고 안은 말하고 나서 자기의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나도 피곤해 죽겠습니다. 안녕히 주무세요.”
    라고 나는 아저씨에게 말하고 나서 내 방으로 들어갔다. 숙박계엔 거짓 이름. 거짓 주소. 거짓 나이. 거짓 직업을 쓰고 나서 사환이 가져다 놓은 자리끼를 마시고 나는 이불을 뒤집어 썼다. 나는 꿈도 안 꾸고 잘 잤다.
    다음날 아침 일찍 안이 나를 깨웠다.
    “그 양반 역시 죽어 버렸습니다.”
    안이 내 귀에 입을 대고 그렇게 속삭였다.
    “예?” 나는 잠이 깨끗이 깨어 버렸다.
    “방금 그 방에 들어가 보았는데 역시 죽어 버렸습니다.”
    “역시…….” 나는 말했다. “사람들이 알고 있습니까?”
    “아직까진 아무도 모르는 것 같습니다. 우선 빨리 도망해 버리는 게 시끄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자살이지요?”
    “물론 그렇겠죠.”
    나는 급하게 옷을 주워 입었다. 개미 한 마리가 방바닥을 내 발이 있는 쪽으로 기어오고 있었다. 그 개미가 내 발을 붙잡으려고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나는 얼른 자리를 옮겨 디디었다.
    밖의 이른 아침에는 싸락눈이 내리고 있었다. 우리는 할 수 있는 한 빠른 걸음으로 여관에서 멀어져 갔다.
    “난 그가 죽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안이 말했다.
    “난 짐작도 못했습니다.”라고 나는 사실대로 이야기했다.
    “난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코트의 깃을 세우며 말했다.
    “그렇지만 어떻게 합니까?”
    “그렇지요. 할 수 없지요. 난 짐작도 못 했는데….” 내가 말했다.
    “짐작했다고 하면 어떻게 하겠어요?” 그가 내게 물었다.
    “씨팔것. 어떻게 합니까? 그 양반 우리더러 어떡하라는 건지….”
    “그러게 말입니다. 혼자 놓아두면 죽지 않을 줄 알았습니다. 그게 내가 생각해 본 최선의. 그리고 유일한 방법이었습니다.”
    “난 그 양반이 죽으리라는 짐작도 못 했으니까요. 씨팔것. 약을 호주머니에 넣고 다녔던 모양이군요.”
    안은 눈을 맞고 있는 어느 앙상한 가로수 밑에서 멈췄다. 나도 그를 따라서 멈췄다. 그가 이상하다는 얼굴로 나에게 물었다.
    “김형. 우리는 분명히 스물다섯 살짜리죠?”
    “난 분명히 그렇습니다.”
    “나두 그건 분명합니다.” 그는 고개를 한번 기웃했다.
    “두려워집니다.”
    “뭐가요?” 내가 물었다.
    “그 뭔가가. 그러니까….” 그가 한숨 같은 음성으로 말했다. “우리가 너무 늙어 버린 것 같지 않습니까?”
    “우린 이제 겨우 스물다섯 살입니다.” 나는 말했다.
    “하여튼….” 하고 그가 내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자. 여기서 헤어집시다. 재미 많이 보세요.” 하고 나도 그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우리는 헤어졌다. 나는 마침 버스가 막 도착한 길 건너편의 버스 정류장으로 달려갔다. 버스에 올라서 창으로 내다보니 안은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로 내리는 눈을 맞으며 무언지 곰곰이 생각하고 서 있었다.

    (라) 누구든. 그 자체로서 온전한 섬은 아니다.
    모든 인간은 대륙의 한 조각이며. 대양의 일부이다.
    만일 흙덩이가 바닷물에 씻겨 내려가면 대륙이나 모래톱이 그만큼 작아지듯.
    그대의 친구들이나 그대 자신의 영지가 그리 되어도 마찬가지다.
    나는 인류 속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어느 사람의 죽음도 나를 감소시킨다.
    그러니 누구를 위하여 종1이 울리는지를 알고자 사람을 보내지 마라.
    종은 그대를 위해 울리는 것이다.


    # 출제의 배경

    이 문제는 현대 기술 문명사회에서의 인간 소외 현상을 다루고 있다. 시민혁명과 산업혁명 이후 인류는 역사상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사회적 변화를 겪는다. 봉건적 속박으로부터 벗어난 인간은 ‘자율적 개인’을 사상적 기반으로 삼는다. 또한 과학의 발달에 따라 그 이전에는 결코 존재하지 않았던 세계를 스스로 창조했으며. 그 자신이 만든 전문적인 기구를 이끌어 갈 복잡한 사회 기구를 구축했다. 이 거대하고 복잡한 사회 체계 속에서 인간은 엄청난 풍요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인간이 만든 것들이 강력해지고 거대해질수록 인간들은 스스로의 창조자와 중심체로서가 아니라 자기 손으로 만든 세계의 심부름꾼으로 느끼며 무력해진다. 또한 근대산업사회의 전개에 따른 ‘소유적 개인주의’와 ‘도구적 합리성’은 점차 인간의 공동체적 삶의 파괴하기 시작하였으며. 개인의 자유에 대한 집착은 ‘남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으면 무엇이든 해도 좋다’라는 가치의 아노미 상태를 합리화시켰다.

    그리하여 현대인은 사회조직으로부터 소외되고. 기계와 기술에 의해 소외되고. 인간관계도 다른 인간으로부터 소외되고. 심지어 자기 자신으로부터 소외되었다. 현대인은 또한 거대한 사회조직의 대체 가능한 부속품이 되었으며. 기계화되고 자동화되는 생산과정에서 노동으로부터 소외되었다. 인격적 유대를 갖는 공동체를 상실하였으며. 개개인이 원자화된 대중으로서 군중 속에서도 고독하게 소외된 인간이 되었다. 현대인은 주체적인 인간으로서의 본질을 잃고 자동인형 같은 인간이 되었으며. 다수라고 하는 익명의 권위에 무조건 순응하는 동조적 인간이 되고 말았다.

    # 어떻게 문제에 접근할 것인가

    지문 (가)는 에릭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 (나)는 루이스 멈포드의 《예술과 기술》. (다)는 김승옥의 소설 <서울. 1964년 겨울〉. (라)는 존 단의 시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의 일부분이다.

    전체 제시문들을 관통하는 주제는 현대 기술문명사회에서의 인간 소외 현상이다. 이 문제의 주어진 조건은 (가)∼(다)에서 현대인이 처한 상황의 여러 가지 모습들을 분석하고. (라)를 바탕으로 그 극복 방안을 제시하도록 하는 것이다. 따라서 문제 해결을 위해는 먼저 이러한 조건을 충족하는 데 유의해야 한다.

    (가)는 한 사람의 고객이 물건을 사는 과정에서 파는 사람과 관계는 단절되어 그가 누구인가는 상실된 채 수많은 불특정한 소비자 가운데 어떤 한 사람으로 취급 받는 모습을 지적하고 있다.

    (나)는 또 다른 예로. 상상력이나 예술적 창의력조차도 모두 기계에 의존하게 된 현대인이 자신이 누리는 여가 시간에도 홀로 기계와 대면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

    (다)는 인간 소외로 빚어진 인간관계의 단절을 극명하게 보여 주는 소설의 한 장면으로. 같이 동행하던 한 사람의 죽음을 나머지 두 사람이 받아들이는 태도를 통해 죽음에까지 이른 그 사람의 번민이나 삶에는 관심이 없고 그것이 자신의 삶에 귀찮은 문제거리가 되지 않기 위해 피해 버리는 현대인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세 지문을 종합해 보면 현대인은 물질화. 기계화. 인간관계의 단절 등을 통해 인간 소외의 상황에 처해 있다고 할 수 있다.


    # `소외`란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소외’라는 말은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된다. 먼저 사회적 관계 속에서 특정한 사람들로부터 따돌림 당하는 상황을 소외라 부른다. 반 친구들에게 왕따 당하는 게 그 예가 될 수 있다. 또 일부 기득권층이 부를 독점하거나 일부 정치가들이 정책을 독단적으로 결정할 때 대다수 사람은 소외되어 있다.

    하지만 철학적으로 ‘소외’는 좀 다른 의미를 가진다. 독일의 철학자 포이에르바하는 이전에 쓰였던 소외의 의미를 새롭게 규정했는데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쓰는 ‘소외’라는 의미의 핵심이 된다. 포이에르바하는 종교적 신비주의를 비판해. ‘인간이 만들어낸 신이 오히려 인간을 지배’하는 것을 두고 ‘소외’라고 보았다. 즉 ‘소외’란 ‘인간이 자신을 위해 만들어낸 피조물에 의해 거꾸로 지배를 받는 현상’이다.

    이것을 확장해보면. 인간이. 자기들이 만들어 낸 기계를 신봉하고 기계에 지배당하며. 자기들이 만들어낸 제도를 신격화해 제도를 맹종하며. 자기들이 만들어 낸 돈의 노예가 되어 돈을 인생의 주인으로 섬긴다는. 오늘날 ‘소외’의 기본적인 개념은 포이에르바하로부터 시작되었다.
    이러한 ‘소외’는 결국 ‘인간다운 자기’로부터 소외를 의미한다. 인간이 자신의 힘과 풍요함의 적극적인 소유자로서 스스로를 체험하지 못하고 기계나 상품 등 외부의 어떤 힘에 좌우되는 자신을 체험하고 있으니 ‘진정한 자기’로부터 동떨어진 삶을 살아가게 된다.


    # `소외`는 왜 나타나는가

    ⒜ 상품화
    자본주의 체제는 교환가치가 사용가치보다 우월한 사회다. 교환가치가 지배하는 자본주의 사회는 모든 것을 물질로. 돈으로 대체해 바라보기에 사람들의 관계가 사물의 성격을 지닌다. 즉 ‘물화(物化)’가 나타난다.
    인간은 자기 주변의 모든 것을 물질의 눈으로. 상품관계로 바라본다. 그래서 사람들은 ‘2억 원짜리 아파트’ ‘3천 원짜리 햄버거’라는 말을 흔히 한다.

    이런 말은 사물의 여러 속성 중 하나가 아니라 사물을 기술하는 가장 핵심적인 요점으로 쓰인다. ‘2억 원짜리 아파트’라고 할 때. 사람들은 아파트의 유용성이나 아름다움 같은 구체적인 성질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화폐량으로 나타낸 상품으로서의 교량의 교환 가치에 관심을 갖는다.
    물론 아파트의 유용성이나 아름다움에 전혀 관심이 없다는 뜻이 아니고. 대상물을 경험할 때 아파트의 교환 가치에 밀려 그 구체적 사용 가치는 2차적인 것이 되었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사물을 사고 팔 때뿐 아니라 경제적인 거래 행위가 모두 끝난 뒤에도 그 사물에 대한 우리 자신의 태도에서는 모든 사물이 교환 가치의 구현물인 상품으로 경험된다.

    ⒝ 관계의 피상화, 익명화
    도시가 발달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한 지역에 모여 살게 되었다. 그런데 대도시의 사람들은 서로 낯설고 인간적 유대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모래알 같은 존재들이다. 이처럼 많은 인구가 밀집되어 생활하다 보니 정서적 유대 없이 서로 무관심해지게 된다.

    우리는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길거리의 가로수를 볼 때나 다름없는 눈으로 바라본다. 옆집에 누가 사는지. 아래층에서 피아노 치는 사람이 누구인지 관심이 없다. 그저 우리에게 피해나 주지 않기를 바란다. 우리는 무수한 사람들과 만나고 스쳐가지만 그들은 나에게. 나는 그들에게 무의미한 존재다. 우리 모두는 서로에게 낯선 존재. 즉 익명의 존재나 다름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친구 사이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지금 당장은 이용가치가 없으나 훗날 이용가치가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항상 어떤 우정을 가지고 대한다. 마치 고용주가 피고용자를 대하듯. 장사꾼이 고객을 대하듯. 오늘날 인간관계에서는 사랑이나 증오가 그리 뚜렷하게 발견되지 않는다. 오히려 피상적인 우정. 그리고 피상적인 공정(公正)은 있지만. 그 껍질 뒤에는 거리감과 무관심이 도사리고 있다.

    ⒞ 부품화
    찰리 채플린 주연의 <모던 타임즈 designtimesp=9709>라는 영화가 있다. 인간이 톱니바퀴로 상징되는 기계에 의해서 인간의 인간성을 상실해 기계의 노예로 전락되어 가는 피폐화된 삶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 영화다.

    이처럼 오늘날 수 많은 사람들은 기계 부품처럼 되어버렸다. 공장의 거대한 생산 시스템 안에서 노동자들은 분업 체제에 의해 나누어진 일부 공정만을 담당할 뿐이다. 스스로 생산의 주체로서 노동을 기획하고 다른 이들과 토론하고 협동하며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기계의 한 부속품이 되어 아무 생각 없이 단순작업을 반복하며 정작 노동하는 자신조차 그 의미와 목적도 잘 모르는 상품을 만들어 낸다.

    그래서 그에게 ‘일’은 자아실현의 수단이 아닌 힘들고 지겨운 돈벌이의 수단으로 전락하게 된다. 사람들은 노동에서 기쁨과 보람을 맛보기보다는 휴일이나 손꼽아 기다리게 된다.

    또한 노동자의 존재 가치가 격하된다. 공장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공동작업을 한다. 그중에서 몇몇이 없다 해도 생산 공정에 차질을 빚지는 않을 것이다. 노동자는 거대한 생산 설비에 딸린 부속품 같아. 개개인은 있으나 마나 한 보잘것없는 존재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노동자들은 인간으로서의 독자적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 채 생산 설비와 마찬가지로 회사를 위해 언제든지 정리될 수 있는 도구가 된다.

    요즘 신문을 펼치면 ‘A기업이 비용 절감을 위해 2천 명을 구조조정 했다’는 기사를 자주 볼 수 있다. 이는 ‘비용 절감을 위해 기계 2천 대를 최신 설비로 바꿨다’는 기사와 다름없어 보인다. 요즘 세상에 인간의 존엄과 가치는 객쩍은 소리에 불과하다. 회사 입장에서 노동자는 쓰다 버릴 수 있는 기계와 다름없다.

    [사진설명]  인간이 톱니바퀴로 상징되는 기계의 노예로 전락해가는 모습을 그린 찰리 채플린의 영화 '모던타임즈'.

     

    <경남초암아카데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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