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  |   유튜브  |   facebook  |   newsstand  |   지면보기   |  
2024년 04월 17일 (수)
전체메뉴

[금요칼럼] 책은 쾌락이다

  • 기사입력 : 2007-05-11 09:44:00
  •   
  • 신문이나 잡지의 책 소개란에서 꼭 읽고 싶은 책을 보았을 때 내 가슴은 무작정 설렌다. 예컨대 내가 흠모해 마지않는 수잔 손택의 ‘우울한 열정’이 나왔다거나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 완역판이 소개되면 그 책을 갖고 말겠다는 거의 종교적인 믿음에 휩싸여 서점으로 가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럴 때 내 가슴은 망치질하듯 쿵쾅거리고 발걸음은 거의 뛰다시피 한다. 잊고 있던 첫사랑의 애인이 불러주기라도 한 것처럼 이 순간의 급격한 심장 박동소리는 언제나 매력적인 전율을 느끼게 한다. 이 가슴 뛰는 기분이란 사랑처럼 얼마나 낭만적인가.

    실제 책이란 읽는 것임과 동시에 책의 두툼한 무게와 종이의 질감을 느끼며. 글쓴이의 영혼이 배인 향기를 맡으며 어루만지는 일이다. 또 빼곡한 활자들 속으로 순례하는 길이면서도. 뱃사람을 이끌어가곤 했던 사이렌들의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책은 종종 관능적인 성적 언어로 표현되기도 한다.

    일찍이 상허(尙虛) 이태준은 책을 두고서 “한 표정 고운 소녀와 같이. 한 그윽한 눈매를 보이는 젊은 미망인처럼 매력은 가지가지다”라고 하면서 “우선 소유하고 본다”는 자신의 속내를 밝혔다. 최근의 비평가인 롤랑 바르트조차도 ‘텍스트의 즐거움’에서 “텍스트는 인간적인 형태를 가진 형상. 육체의 아나그람(anagramme:글자 수수께끼. 혹은 글자를 뒤바꾸어 새로운 뜻을 나타나게 하는 것)일까? 그렇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관능적인 육체의 아나그람이다. 육체의 즐거움이 생리적인 욕구로 환원될 수 없듯이. 텍스트의 즐거움 또한 그 문법적인 기능(현상텍스트)으로 환원될 수 없다”고 진술한다. 즉 텍스트를 ‘아는 것’은 성적으로 ‘아는 것’과 차이가 없다면서 자신이 갖고 있는 텍스트의 성애론을 펼쳤다.

    오죽하면 책을 몸으로 비유하여 관계하는 이런 묘사도 있겠는가. “그는 그녀의 책 속에 깊이 들어가서 각 단락을 핥아가면서 책장을 더듬고 그녀의 제본된 등을 여기저기 손으로 문질렀다.” 이 은유가 함축하는 바는 아무도 없는 방에서 책을 밝히는 고즈넉한 형광등빛 아래 배를 깔고 누워서 이리저리 뒹굴며 책을 보는 일이 어쩌면 텍스트의 무의식적인 ‘플롯’의 리듬에 몸이 반응하여 무한히 이어질 해석의 ‘절정’을 기다리는 것과 흡사한 것이리라.

    그러면서도 빌리거나 빌려준 책들. 소위 ‘유통’되는 책에 대해서는 여러 ‘손’을 탄 것이어서 많은 얼룩과 흠이 있는 것으로 여긴다. 남에게서 더렵혀진 채로 온 것이기 때문에 “적이 질투를 느끼”거나 “그 책에 대하여 전혀 흥미를 잃어버리는 수가 많다”고 고백하기도 한다.

    셰익스피어도 이런 식으로 말했다. 데스데모나가 부정하다고 의심하는 오셀로가 그녀를 바라보면서 “이 아름다운 종이가. 이 훌륭한 책이 / 그 위에 ‘창녀’라고 쓰라고 생겨났단 말인가”(오셀로 4막 2장 중)하고.

    이처럼 책의 훼손과 처녀성의 의미 맥락이 동일시되고 문학적 창조력도 성적인 관점을 통해 투과될 때는 여성의 섹슈얼리티도 텍스트성과 일치된다. 책을 단순한 물질이 아닌 순전히 육체적인 존재. 더욱이 여성의 몸으로 생각해 온 오래된 전통은 남근중심주의 사회가 만들어 온 사물의 전치(轉置) 방식의 한 형태인 것이라 여겨지지만 이 세상의 모든 책에는 사람들을 빠져들게 하는 신선하고 낯선 관능성이 숨어 있다는 뜻이다. 책을 사랑하는 것은 곧 자신의 생을 더 풍요롭게 하는 일이니 가능한 한 오래도록 사랑하라고 권하고 싶다.

    그런데 사람들에게 욕망과 즐거움을 충족시켜야 할 책의 풍요로운 소비처인 서점들이 이 도시에서 하나씩 사라지고 있다. 들어서면 사람들의 살냄새로 따스해지고. 때로는 아는 사람들과 눈인사라도 나누면서. 잔잔한 음악소리 속에 책을 선택해 왔던 20년 동안의 단골서점이 지난 3월 경영부진으로 문을 닫아 버려 내 쾌락의 원천이 사라진 듯 마음이 울적하다. ‘가정의 달’ 5월이다. 신록의 그늘이 짙어지는 이 시기에 아이와 어버이 그리고 스승을 기리는 기념일이 몰려 있어 또한 ‘사랑의 달’이라 불릴 만도 하다. 그런 사랑의 사람들에게 책의 쾌락을 누리게시리 좋은 책들을 선물해 보면 어떨는지. 우무석(시인)

  • < 경남신문의 콘텐츠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전재·크롤링·복사·재배포를 금합니다. >
  • 목진숙 기자의 다른기사 검색
  •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플러스 카카오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