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  |   유튜브  |   facebook  |   newsstand  |   지면보기   |  
2024년 04월 19일 (금)
전체메뉴

[금요칼럼] 여행의 풍경, 그 기대와 배반 - 우무석(시인)

  • 기사입력 : 2007-11-02 00:00:00
  •   
  • “혼자서,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이, 낯선 도시에 도착하는 공상을 나는 몇 번씩이나 해 보았었다.” 장 그르니에의 산문집 <섬>에 나오는 이 한 구절은 얼마나 매혹적이었던가.

    치기어린 스무 살 무렵의 맹목적 방황에 대한 유혹과 자유로움에의 뜨거운 열정이 다시금 생생하게 만져지면서 문득 그때처럼 무작정 떠나고 싶은 충동을 일으키기도 한다. 어쩌면 그런 여행은 저 먼 곳을 향한 마음의 풍경을 찾아가는 일이거나 떠나간 곳에서 떠나온 곳을 되돌아본 고향에의 그리움 같은 것이다. 아니면 세상의 길 위에서 바람에게 홀리는 일일는지도 모른다.

    “어느 날 아침 우리는 떠난다. 머릿속은 불꽃으로 타오르고 / 마음은 원한과 서글픈 욕망으로 가득한 채 / 그리고 우리는 간다, 물결이 선율을 따라 / 유한한 바다 위에 우리의 무한을 흔들며”(보들레르, ‘여행’, 윤영애 번역)

    여행에 열광했던 시인 보들레르가 물결을 타고 끝없이 떠나는 나그네들의 이야기를 통해 인간정신의 지적 모험과 그 덧없음을 노래한 이 시에도 무한한 바다가 가져다 주는 그 먼 곳에의 풍경이 빛나고 있다. ‘여행’이라는 말에는 언제나 낯선 이국풍물과 같은 신기한 것에의 기대와 흥분이 섞인 박동소리가 있다. 살아가면서 가슴을 마구 엉클어 놓는 그 먼 곳에 대한 아련한 동경과 원인 모르는 텅 빈 충만에의 욕구가 깊어지면 사람들은 낯선 길을 걷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여행은 쓸쓸한 감미로움이며 잡아둘 수 없는 고요한 아름다움의 풍경인 것이다. 대충 이런 낭만성이 잠겨있는 감정이 여행자의 마음일 것이다.

    그러나 막상 여행지에 도착해보면 설레고 들떴던 기대감은 싸늘한 배반감으로 와닿는 경우가 종종 있다. 최근에 D대학 국문과 교수가 제자들과 함께 진해를 찾았다. <삼국유사 designtimesp=26494> 가락국기 조에 나오는 허황옥의 자취를 답사하는 여행 중이었는데 필자는 지역의 길 안내를 맡아 그들과 함께하였다. 이렇게 문학 배경지를 찾는 여행은 대학의 국문과 학생이거나 문학하는 사람이라면 어느 누구나 거쳐야 할 통과제의 같은 의식으로 자리잡은 지도 꽤나 오래된 일이다. 더욱이 삼국유사의 문학여행 중 망산도(望山島)와 유주각(維舟閣)은 수로왕 신화에 버무려진 허황후의 신행길에서 빼놓을 수 없는 첫 번째 관문으로 여긴다.

    망산도에서 바라볼 때 ‘바다 서남쪽 모퉁이를 따라 붉은 돛을 단 배 한 척이 붉은 깃발을 나부끼며 북쪽으로 다가오는’ 그런 모습은 이제는 아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풍경만 남아 있다. 바다를 메운 터에 녹산공단의 공장단지가 앞을 가로막고, 붉은 깃발의 배가 들어왔다던 그 바다에도 신항이 조성되어 높다란 타워크레인들만 눈에 가득 찬다.

    왕후의 도래지에 대한 상상에 부푼 가슴으로 남도를 찾아온 그들의 설렌 기대는 망산도를 둘러본 뒤 순식간에 배신당한 표정의 낭패감으로 바뀌었다. 그것은 망산도가 앉아있는 자리[空間]와 지리[實地] 때문만은 아니었다. 등껍질이 갈라진 암석 틈 사이에 남색 바닷물이 보석처럼 출렁거리고 있어야 하는 것은 고사하고, 그곳에는 기름때 낀 탁한 물결 속에 스티로폼 어구와 빈 페트병과 넝마걸레들이 부표처럼 둥둥 떠다녔다. 패총이 있었다던 작은 동산에 이르는 길에 웬 분홍색 여성 내복과 군데군데 이불보로 쓰였음직한 천들이 때에 전 채 널려있는지, 으슥한 곳에는 금빛 쇠파리로 뒤덮인 인분덩이가 덩그러니 놓인 불결하고 더러운 쓰레기장 같은 역한 풍경 때문이었다.

    괜스레 필자가 미안해져서 풍경뿐만 아니라 삶에 있어서도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라고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았지만, 그들은 다시 이곳으로 오지 않을 것이라는 다짐만 들어야 했다. 생각해 보건대 우리 사회에서 낭만적 여행을 기대하는 감성 풍부한 그들의 마음이 잘못된 것이다●

    우 무 석
    시인

  • < 경남신문의 콘텐츠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전재·크롤링·복사·재배포를 금합니다. >
  • 목진숙 기자의 다른기사 검색
  •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플러스 카카오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