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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6년 청 태종, 10만 대군 이끌고 조선 침입

  • 기사입력 : 2007-12-03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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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 속의 이번 주 (3~9일)

    ▲병자호란 일어남(1636. 12. 9)

    1632년 후금은 만주 전역을 석권하고 명나라 북경을 공격하면서, 조선에 양국관계를 형제지국에서 군신지의로 고칠 것과 황금·백금 1만 냥, 전마 3000필, 정병 3만명을 요구했다. 또한 1636년 2월 조선의 신사(臣事)를 강요했으나, 인조는 후금사신의 접견마저 거절하고 8도에 선전유문을 내려, 후금과 결전할 의사를 굳혔다.

    1636년 4월 후금의 태종은 황제를 칭하고 국호를 청(淸)이라고 고쳤으며, 조선이 강경한 자세를 보이자 왕자·대신·척화론자를 인질로 보내 사죄하지 않으면 공격하겠다고 위협했다. 그러나 조선은 주화론자보다는 척화론자가 강하여 청나라의 요구를 계속 묵살했다. 12월 2일 이런 조선의 도전적 태도에 분개한 청나라 태종은, 청·몽골·한인(漢人)으로 편성한 10만 대군을 스스로 거느리고 수도 선양을 떠나, 9일 압록강을 건너 쳐들어왔다. 의주 부윤 임경업은 백마산성을 굳게 지켜 청군의 침입에 대비하였으나, 선봉장 마부대는 이 길을 피하여 서울로 진격했다.

    1637년 1월 1일 태종이 도착하여 남한산성 아래 탄천(炭川)에 20만 청나라 군을 집결시켜, 성은 완전히 고립되었다.청 태종은 조선의 항복을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인조가 친히 성 밖으로 나와 항복하되, 양국관계를 악화시킨 주모자 2~3명을 잡아 인도할 것을 요구했다. 1월 30일 인조는 세자와 500명을 거느리고 성문을 나와, 삼전도에 설치된 수항단에서 태종에게 굴욕적인 항례를 한 뒤, 한강을 건너 환도했다. 청나라는 약속에 따라 소현세자·빈궁·봉림대군 등을 인질로 하고, 척화의 주모자 홍익한·윤집·오달제 등 삼학사를 잡아갔다. 이로써 조선은 완전히 명나라와는 관계를 끊고 청나라에 복속하게 되었다. 이상규기자

    ▲우정국 개국, 최초의 우표 발행 (1884. 12. 4)

    ▲국민교육헌장 선포 (1968. 12. 5)

    ▲통일주체국민회의, 제10대 대통령에 최규하 선출 (1979. 12. 6)

    ▲한국, 국제노동기구(ILO)에 정식 가입 (1991. 12.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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