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  |   유튜브  |   facebook  |   newsstand  |   지면보기   |  
2024년 04월 25일 (목)
전체메뉴

주기철 목사 기념관 건립 빛 보나

2001년 생가복원운동 8년 만에 사업 가시화
진해시, 부지 기부채납받는 대로 용역 발주

  • 기사입력 : 2008-01-04 00:00:00
  •   

  • 주기철 목사 기념관·생가 조감도



    일제 강점기 때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투옥돼 순교한 진해 출신 주기철 목사의 기념관 건립 및 생가복원 사업이 가시권에 들었다. 지난 2001년 그를 기리기 위한 생가복원운동이 시작된 이후 8년 만이다.

    주기철 목사는 독립기념관과 국가보훈처가 공동으로 선정한 2007년 11월의 독립운동가이다. 그는 평양 산정현교회 목사로 있을 때 일제에 의해 투옥돼 모진 고문 끝에 숨졌다.

    ●경과● 그가 어릴 적 다녔던 진해 웅천교회를 중심으로 지난 2001년 ‘주기철 목사 생가복원운동’이 시작됐다. 교회에 주 목사 순교기념관을 갖고 있는 웅천교회측은 생가복원에 필요한 기금 10억원을 목표로 활동에 들어갔다. 2년 뒤인 2003년 9월 ‘생가복원운동’ 오성한 대표(웅천교회 목사)와 김병로 진해시장이 생가복원사업 후원금 지원협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이후 사업은 크게 진척되지 못했고, 지난 2006년 4월 ‘생가복원운동’측은 시에 사업포기 의사를 밝혔다. 이 운동은 진해시기독교연합회의 ‘주기철 목사 순교기념관 건립추진위원회’를 거쳐 지난해 대한예수교장로회 경남노회로 넘어갔다.

    경남노회는 ‘주기철 목사 기념재단’을 꾸린 뒤 산하 교회를 통해 모금운동에 들어갔고, 지난해 12월 말 기념관 건립 등에 필요한 부지 2000여㎡를 8억원을 들여 매입하는 계약을 체결했다. 주 목사의 생가터와 인접한 북부동 지역이다.

    ●향후 계획● 경남노회가 내달께 부지 매입을 완료해 시에 기부채납하는 절차를 거치면 기념관 건립사업은 본격화될 수 있다.

    시는 부지를 기부채납받는 대로 전국 유사 기념관에 대한 현지조사를 거쳐 실시설계 용역을 발주할 계획이다. 진해시 북부동 6 일대 1만여㎡의 부지에 25억원(기부채납 부지 매입대금 10억원 포함)을 들여 생가와 기념관 등을 건립한다는 당초 계획에는 수정이 불가피하지만, 기념관 건립 자체는 현실화되고 있는 셈이다.

    경남노회 주기철 목사 기념재단의 이성관 목사는 “주 목사께서는 교계의 어른이시고 또 기독교를 위해 엄청난 기여를 하신 순교자”라며 “우선 순교기념관을 건립하고, 이후 관련사업을 계속 이어갈 것”이라고 말했다.

    서영훈기자 float21@knnews.co.kr


    일제때 신사참배 거부 순국

    ●주기철 목사는= 1897년 11월 창원군 웅천면 북부리(현 진해시 북부동)에서 주현성 장로의 넷째 아들로 태어난 그는 13살 되던 해인 1910년 형을 따라 웅천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다.

    1916년 기독교계 사립학교인 오산학교를 졸업한 그는 조선예수교대학교(연희전문학교의 전신) 상과에 입학하였으나, 1년 만에 중퇴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교회 집사로 활동했다.

    이후 성직으로 나갈 것을 결심하고 1922년 3월 평양장로회신학교에 입학했고, 25년 졸업과 동시에 부산 초량교회를 시작으로 목회자로 활동하였다.

    1931년에는 마산 문창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한 그는 교계의 지도자로서 인정을 받았고 설교가로서도 이름이 높았다.

    문창교회에 이어 평양 산정현교회에 부임한 그는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맞서다 1938년 투옥됐다 모진 고문의 후유증으로 결국 1944년 4월 21일 평양형무소에서 순국했다.

    정부는 1963년 그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 < 경남신문의 콘텐츠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전재·크롤링·복사·재배포를 금합니다. >
  • 서영훈 기자의 다른기사 검색
  •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플러스 카카오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