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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1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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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칼럼] 평화는 선택으로 오지 않는다

범진 스님(성주사 지도법사)
“편견을 편견으로 인정하는 것이 편견을 극복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 기사입력 : 2008-09-12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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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난 8월 27일 20만 불자들이 모인 가운데 서울광장에서 범불교도대회를 가진 불교계의 요구가 어떤 것이었는지 이미 언론을 통해서 일반인들에게도 널리 알려진 만큼, 아마 독자들은 이 글을 읽기도 전에 먼저 그 내용을 지레짐작할지도 모르겠다. 또 비분강개하면서 정부의 불교 차별 사례를 나열하거나, 그런 불교 차별 행위에 대해서 대통령의 사과나 경찰청장의 사퇴를 요구할 것이라고…. 하지만 비록 그런 표면적인 주장들을 불자들이 내세우고 있다고 하더라도, 불교계에서 주장하는 바의 핵심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평화’ 에 있다는 점을 필자는 말하고 싶다.

    불교에서의 모든 수행은 해탈, 혹은 열반으로 수렴된다. 열반이 서양에서는 피스(peace)라는 단어로 영역되는 예에서도 알 수 있듯이 열반이 곧 평화이고, 평화가 다시 열반이다. 그리고 그 평화는 결코 ‘선택’에 의해서 이루어지지는 않는다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선택은 태생적으로 배타성을 띨 수밖에 없는데, 선택이 배타성을 지니는 이유는 그 선택이 의지하는 바가 언제나 오직 자기 자신의 가치관이기 때문이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8·27 불교대회 바로 다음 날, 대통령은 불교계와 대척점에 서 있고, 목사가 회장으로 있는 ‘뉴라이트’라는 조직의 회원들을 청와대로 불러서 오히려 그들에게 도움을 청했다고 한다. 말하자면 ‘평화’를 요구했더니 ‘선택’으로 답한 것이다. 짐작컨대 대통령의 생각은, 어차피 모두에게 지지를 받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한쪽을 선택해서 그 한쪽에 의지해서 국정을 추진하겠다는 것일 테고, 그런 선택은 그 자신이 가지고 있는 어떤 고정된 사유방식에 의지한 것일 게다.

    고정된 사유방식을 우리는 ‘편견’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편견은 모든 인간이 가지고 있는 피할 수 없는 한계이기 때문에 편견을 비난할 권리는 이 세상 누구에게도 허용되지 않는다. 단지 그 편견을 편견으로 인정함, 나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은 그저 나의 가치관일 뿐이지 세상 어디에도 남에게 나의 가치관을 강제할 권리가 없음을 부단히 인정하는 것, 그것이 바로 편견을 극복하는 유일한 길임을 불교는 가르친다.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바른 견해(正見)의 뜻이며, 또한 고름(平)의 뜻이다. 그리고 그러한 ‘고름’을 위한 부단한 자기 부정의 노력이 만들어낸 결과가 바로 조화로움(和)이니 ‘조화로움’은 이러한 고름이 전제되면서 비로소 얻어지는 것이지, 선택에 의해서 얻어지는 것이 결코 아닌 것이다.

    불교에서 주장하는 것은, 바로 이런 ‘고름’이 모두에게 허용되어야 한다고 것이다. 그런 ‘고름’만이 ‘조화로움’을 담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몇 년째 탁발 순례를 계속하고 있는 실상사의 도법 스님이나 ‘삼보 일배’ 라는 불교의 참회의식을 일반인들에게까지 유행시킨 화계사의 수경 스님과 그의 오랜 친구인 문규현 신부가 벌이고 있는 오체투지의 순례도 더불어 함께 가는 그런 ‘고름’을 위한 부단한 자기 부정, 참회의 몸짓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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