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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칼럼] 창신 100년, 마산의 ‘100년들’ - 조용호 (논설실장)

  • 기사입력 : 2008-09-19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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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산은 ‘역사의 보고’(寶庫)라고 늘 생각해 왔는데, 그 보고에 2008년 9월 15일로써 개교 100주년(1908~2008)을 맞은 창신학교가 더해졌다. 영광과 고난의 100년 역사, 지역사회에서 함께 축하할 일이다. 그 창신학교의 개교 100주년을 보면서 마산의 저 많은 ‘100년 역사들’을 생각한다.

    창신학교란 현재의 마산 창신중·고등학교를 말한다. 호주 선교사 Rev.A.Adamson(한국명 손안로)이 1906년 5월 마산 성호리에 교회당(현 문창교회 전신)을 열고 개설한 독서숙(讀書塾)이 번창하자, 이를 근거로 하여 교명을 창신(昌信)이라 하고 초등 과정의 남녀공학 학교로 개교했다. 1908년 9월 15일이었다. 마산에 신학문의 도입을 알리는 태동이었으며, 최초의 사립학교였다. 교장은 손안로였다. 교육 이념은 기독교의 박애정신에 민주주의와 민족주의, 애국애족, 근대화 등이었다. 남녀공학은 당시로는 혁신적 파격으로 그 의미가 매우 컸다.

    당시 마산에는 1901년 개교한 공립소학교(현 성호초등학교)와 신마산 일본인 조차지에 1902년 문을 연 마산포 일본인 심상고등소학교가 있었다. 성호초등학교는 마산 최초의 학교이자 조선인들이 다니는 학교였다. 일제 치하 조선인들의 유일한 배움터로 한민족의 자존의식을 고취시켰다. 성호초등학교는 이미 2001년 개교 100주년을 맞았고, 마산의 쇠락 이전까지는 경남의 으뜸 가는 초등학교였다. 반면 일본인 소학교는 일본인들이 다녔고, 광복 후 월영초등학교가 들어섰다. 하지만 월영은 개교일을 1945년 10월로 잡고, 광복 이전의 학교는 일본인 학교로 간주한다. 유래로 말한다면 월영은 지난 2002년이 100주년이었다.

    마산의 이런 교육환경에서 창신학교는 1911년 초등과 21명의 제1회 졸업생을 배출하고, 다음 해인 1912년 고등과 인가를 받았으니 중학 과정인 셈이다. 1913년에는 창신학교의 여학생들을 분리하여 의신여학교(현 의신여중)를 만들었다. 2013년이 100년이다. 2년 뒤 1915년 3월엔 마산여고가 2년제 공립마산실과고등여학교로 현재의 중앙동에서 개교했으니, 2015년이면 개교 100주년이다. 이에 앞서 1910년에 사립 성지(聖旨)학교(현 성지여중·고)가 개교했다. 2년 후 100주년이다. 이외 마산항과 마산세관이 1999년 개항·개서 100주년을 맞았고, 마산상의는 2000년, 몽고식품이 2005년 각기 100주년을 맞았다. 마산 역사의 깊은 부문을 말해 준다.

    창신학교의 개교 100주년은 이미 100년을 넘은 부산의 일신학교(동래高 전신), 대구의 계성高와 함께 영남권 3대 ‘고교 역사’로 평가된다.

    역사는 오랜 전통과 연륜의 의미와 더불어 그 역사적 가치가 중요하다. 영욕의 세월을 거쳐 오늘을 있게 한 정신이다. 창신 100주년을 맞아 17일 마산 3·15아트센터에서 열린 학술심포지엄은 이런 부문을 강조한다. 일제 강점기 민족교육과 항일민족운동, 1919년 3·1운동에 이은 3·3시위, 일제의 신사참배 거부 등이다. 그로 인해 폐교도 당했다. 고등과가 1925년 호신(濠信)학교로 이름이 바뀌어 1930년 폐교되고, 초등과도 1939년 폐교당했다. 그 폐교의 직·간접 원인이 일제를 배척한 민족교육과 신사참배 거부, 기독교 정신 때문이었다. 재정 문제도 있었다. 폐교당한 창신학교는 광복 이후 1948년 창신중학교, 1951년 창신농고에 이어 1960년 창신고등학교로 분리하여 재개교했다. 조선어학회사건의 중심인물이었던 한글학자 한결 김윤경, 한뫼 이윤재, 그리고 국어학자 자산 안확이 창신학교의 교사로 재직한 것을 긍지로 삼는다. 한글교육과 언어민족주의이다.

    회원동 교사 시절인 1924년 유명한 붉은 벽돌의 2층 건물이 만들어졌는데, 호주의 빅토리아 주정부에서는 우편엽서에 이 건물 사진을 넣어 기념했다 한다. 호주를 빼고 창신을 말할 수 없다. 교명인 창신의 창(昌)은 ‘문창리’(文昌里)라는 지명에서, 신(信)은 믿음에서 따왔다. 기독교 정신과 민족 신교육이 창신의 건학 배경인 것이다. 다음 100년의 힘찬 거보(巨步)를 내딛기를 바란다.

    금요칼럼

    조 용 호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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