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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0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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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칼럼] 느티나무 극장 - 이서린 (시인)

  • 기사입력 : 2008-09-26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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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할머니, 이 동네 마을회관이 어딥니까?”

    마당에서 한창 잡초 뽑기에 열중인데 울타리 너머로 들리는 말.

    “와? 마을회관은 말라꼬?”

    “아, 예, 에어컨 배달 왔습니다.”

    “에어컨? 오냐, 맞다, 맞다. 저기 왼쪽으로 쫌만 가면 나온다 아이가.”

    잡초를 뽑다가 일어나서 석류나무 사이 울타리 밖을 본다. 파란색 트럭 한 대가 마을회관 쪽으로 달려간다. 텃밭에서 일하시던 옆집 할머니는 손을 틀고 트럭 뒤를 따라가신다. 마음이 바쁘신지 머리에 쓴 수건을 풀어 손에 쥐고 걸음을 빨리 하신다. 나도 잡초 뽑기를 멈춘다. 모자와 면장갑을 벗고 가죽나무 그늘 아래 잠시 앉는다. 마을회관에 에어컨이 들어온다고…. 드디어 시골 마을회관도 에어컨이 들어오는구나.

    지난 7월 말의 일이다.

    북면 무곡리. 이곳에 이사온 지 벌써 8년. 시골의 풍경과 정겨움이야 일일이 다 말할 수 없지만 정말 내가 사랑하는, 도시에서는 그야말로 보기 어려운 광경이 바로 여름밤, 그것도 시골 다른 마을에서도 흔하지 않은 광경이 우리 마을의 여름밤이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저녁 아홉 시) 마을 입구 정자나무 아래는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지고 있다. 마을회관에 에어컨이 들어오면서 잠시 사라졌던, 그래서 마음이 몹시 허전하고 슬펐던, 그러나 다시 볼 수 있어서 정말 고맙고 기쁜 마음에 오래오래 가슴이 따뜻한 풍경.

    캄캄한 시골 밤, 커다란 나무 아래 돗자리를 펴고 마을 어른들은 텔레비전을 보신다. 정자나무 가까운 집, 축대가 약간 높은 텃밭 아래 나무로 만든 곽이 있다. 낮에 보면 그냥 나무상자인데 밤만 되면 나무상자가 열리고 텔레비전이 켜진다. 20인치 중고텔레비전 앞에 어른들은 하나 둘 모이기 시작한다. 무곡리 양촌 야외극장인 셈이다.

    느티나무 아래 나란히 눕거나 앉아서, 달빛과 별빛과 맑은 바람과, 소쩍새, 뻐꾸기, 귀신휘파람새와, 한여름엔 개구리 소리 지금은 가을풀벌레 소리와 함께 하는 야외극장. 드라마를 보면서 한숨과 눈물과 웃음을 같이 하며, 저, 저, 저런 미친 놈, 고마 팍 뒤질 놈, 악역 맡은 배우에게 욕설도 같이 하는, 우리 마을 어른들은 정말 사랑스럽다. 갑자기 비라도 후두둑 떨어지면 아이구 성님, 비 오네예, 빨리 일라이소. 오야, 살살 뛰라, 자빠질라. 행님, 들어가이소. 오야, 자거래이. 밤소나기 쏟아지는 느티나무 아래는 그래서 가끔 바쁘다.

    낮은 낮대로 밤은 밤대로, 정자나무 근처는 사람 냄새 물씬하다. 어릴 적 텔레비전 귀하던 시절, 뒷집 순석이 오빠 집에 밤마다 동네사람들로 넘쳐났던, 마루와 마당, 그것도 모자라 담에까지 올라서서 보는 사람도 있던, ‘여로’라는 드라마 할 때는 절정에 달했던, 그런 추억이 생각나는 무곡리 양촌 느티나무 야외극장.

    어느 날, 마을회관에 에어컨이 들어오고부터 야외극장은 사라졌었다. 밤에 딸을 태우고 들어올 때마다 텔레비전 보시는 어른들 눈부실까봐, 마을입구 들어서면 아예 전조등도 끄고 안개등만 켜고 나무 밑을 지났다. 그러나 꼭 닫힌 나무상자만 덩그라니 있는 나무 밑을 지날 때, 행복한 풍경을 잃은 마음에 시골 밤은 더욱 깜깜하고 쓸쓸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8월 중순 지나자 느티나무 극장은 다시 문을 열었다. 에어컨바람 시원한 회관도 좋지만, 어른들 역시 선풍기와 부채만 있어도 정자나무 밑이 그리웠던 것이다. 찐 옥수수와 감자를 냄비째 갖고 와선 지나가며 인사하는 내게도 꼭 꼭 건네는, 무곡리 양촌 느티나무 극장은 9월인 지금도 성업 중이다. 드라마가 끝나는 밤 11시까지는 언제나 상영 중이다.

    아, 물론 비가 오면 닫히는 극장. 9월이 가고 10월이 오면, 극장은 오랫동안 문을 닫을 것이다. 낙엽이 지고, 별똥이 떨어지고, 눈이 오고, 비가 올 동안, 나무상자는 봄을 꿈꿀 것이다.

    작가칼럼

    이 서 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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