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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칼럼] 순발력이냐, 사유력이냐 - 장성진 (창원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 기사입력 : 2008-11-28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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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옛날 관료 후보를 뽑는 과거 시험 문제를 보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예제 하나. 공자께서 “동산에 올라보고 노나라가 좁은 줄 알았다”고 하셨으며, “태산에 올라보고 천하가 좁은 줄 알았다”고 하셨다. 그렇다면 공자가 두 산에 올라보기 전에는 노나라나 천하가 좁은 줄 몰랐다는 말인가, 아니면 이미 알고 있었으면서 몰랐다고 말했을 뿐인가?

    논술형에 속하는 생원시의 기출 문제이자 예상 문제였다. 논지를 어떻게 전개하든 공자에 대하여 ‘모르셨다’는 해석이 나와서는 안 된다. 그분의 성인 자질을 부정하는 뜻이니, 불합격은 물론 불경죄까지 덧붙여진다. 선의를 전제하더라도 ‘거짓말을 하셨다’고 해서도 안 된다. 공자의 도덕적 완결성에 흠을 내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양립하기 힘든 두 가지 사실을 논리적으로 극복하는 역량을 길러서, 복잡한 백성들의 사정을 이해하고 해결하는 관료로서의 자질을 갖추게 하려는 의도이다.

    예제 둘.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하고, 슬기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한다”는 말이 있다. 어질고 슬기롭기야 공자와 맹자 같은 이가 없건만, 이 두 분이 수레를 타고 천하를 돌아다니면서도 산과 물을 구경하였다는 말은 없다. 안연과 증자도 성인 다음 가는 자질을 가졌지만 시골집에서 소박한 의식주로 지냈다. 그렇다면 어질고 슬기로운 삶과 산수는 무슨 관계가 있는가?

    이미 관료가 된 사람을 포함하여, 국정에 참여하는 고위 관료를 뽑는 대과의 책문 분야 기출 문제이다. 단순히 논리적 설명 능력을 보이라는 뜻이 아니라, 인의예지라는 사람의 본성에 대하여 철학적으로 해명하고, 그것을 자연의 질서에 연결시키는 우주론을 전개하라는 요구이다. 정책을 세우고 국가 중대사를 결정하는 관료들에게는 깊은 예지와 철학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과거제도는 공식적으로 천년 가까이 지속되었다. 그것은 관료로 나아가는 통로였으며, 그것을 통과하면 정치적 권력과 사회적 지위는 물론이고 경제적 부까지 가질 수 있어서 많은 사람이 집착하고 중시하였다. 서당 교육에서부터 각종 공사립 교육기관을 거친 뒤 끊임없이 경전을 읽고 답안 쓰기를 반복하여 마침내 과거에 응시하고, 여러 차례 낙방의 아픔을 딛고서야 비로소 관계로 나아가는 것이 보통이었다. 과거제는 시대의 변천에 부응하는 속도가 늦고, 한문으로 일관하여 사변적인 데 치우치기는 했지만, 근대 이전까지 인류가 시행했던 인재 선발 방식으로는 퍽 우수한 제도였다.

    다시 입시와 취업에 매달려야 하는 시기가 되었다. 지난날의 경험으로 인해, 취업과 입시의 방법은 상당히 유사하게 이어진다. 이번 정부는 출발 단계에서 교육 문제에 대하여 야심찬 개혁 의지를 보였음에도 초기의 몇 가지 어이없는 실수와, 절박한 경제 문제로 인해 주춤한 상태이다. 그런 가운데 각 대학들이 선택하는 입시 방법은 지난해와 유사하면서도 몇 가지 변화를 보인다. 수시모집에서 이른바 심층 면접을 하는 방식은 같지만, 정시모집에서 수능 성적 비중을 아주 높이고 논술의 비중을 낮춘 점이 다르다.

    수시 모집에서 시행하는 심층 면접이란, 대개 수험생이 문제를 5분 내지 10분간 보고서 그만큼의 시간 동안 답하는 방식이다. 더러는 문제의 요지를 분명하게 이해하지 못하기도 하고, 주어진 시간을 채워서 답하지 못하기도 한다. 이로 인해 깊은 사고나 응용 능력보다 순발력이 점수를 크게 좌우한다. 이미 수능 시험도 문제의 핵심을 빨리 찾아내는 기민함을 필요로 하는 데다 논술마저 시행하지 않거나 비중을 낮추고 보니, 진중하게 깊이 사유하는 능력은 발휘되기 더욱 어렵다.

    우수한 학생을 유치하려는 대학간의 경쟁은 점점 치열해진다. 그러나 순발력을 갖추고 고득점을 한 학생을 유치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 폭넓고 깊은 사유 능력을 기르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리고 이러한 방향 설정은 입시 제도를 통해서 가장 잘 확립할 수 있다. 대학 운영자들이 과거 시험 답안지를 한번씩 본다면 좋은 참고 자료가 될 것이다.

    금요칼럼

    장 성 진 창원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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