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  |   유튜브  |   facebook  |   newsstand  |   지면보기   |  
2024년 04월 19일 (금)
전체메뉴

[금요칼럼] 노산, 왜 마산에서만 아닌가 - 조용호 (논설실장)

  • 기사입력 : 2008-12-19 00:00:00
  •   
  • ‘노산 문학관’ 개칭과 노산 이은상의 문제에 있어 재론의 부분도 있지만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친일 혐의와 3·15 시각 및 독재 협조 정황, 문학적 업적이다.

    친일 혐의에 있어 ‘일제의 괴뢰정부였던 만주국 기관지인 <만선일보>에 재직했다’는 주장이다. 김복근은 이에 대해 그의 저서 ‘노산시조론’에서 “그런 신문사가 없고, 설령 있었다 하더라도 재직한 적이 없다”고 밝혔다. 또한 “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구금된 뒤 45년 재구금된 것을 보면 <친일=재구금 >은 논리상 맞지 않다”고 했다. 지난 4월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도 노산의 이름은 없다. 친일과는 무관하다.

    3·15의거와 관련하여 1960년 4월 15일자 조선일보의 답변 내용이 논란이다. 조선일보는 당시 ‘마산사태’에 대해 문화계 인사 10여 명을 대상으로 설문을 제시한 후 의견을 들었다. 이은상은 “불합리 불합법이 빚어낸 불상사, 지성을 잃어버린 데모, 과오의 연속은 이적의 결과”라고 말했다. 또한 “관(官)의 편견이 너무 강했다. 내가 마산 사람이기 때문에 고향 걱정하는 마음이 크다. 여야 막론하고 참으로 나라를 사랑하는 지도자가 있다면 초당적·연립적·거국적·비상시적인 유능한 내각을 구성하여 국민이 원하는 새 국면을 열어야 한다”고 답했다. 불법·이적이라 했으면서도 관(官)을 나무라고, 국민이 원하는 새 국면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4월 15일은 4일 전 김주열의 시신이 발견되어 분노한 시민들의 2차 의거가 발발했던 때였다. 4·19가 목전이었다. 때문에 혼돈과 걱정이 교차한 복합적 측면이 있다. 연구할 여지가 많이 남아 있다.

    독재 협조 정황과 관련, 자유당 선거유세단에 참여하고, 박정희·전두환 독재 정권에 이르기까지 협조했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개인의 언행을 어디까지 문제 삼아야 하며, 그 ‘독재’라는 이름의 ‘협조의 수위’가 어느 정도인지 재단하기 어렵다. 또한 박정희의 평가는 각기 다르다. 물론 흠결은 될 수 있다. 시인 이달균은 이에 대해 “정작 친일한 김용호와 전두환 독재정권에서 국회의원까지 한 김춘수는 왜 탓하지 않느냐”고 반박한다.

    노산은 1903년 마산에서 태어나 창신학교를 나와 1982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60년간의 창작활동을 통해 방대한 문학적 업적을 남겼다. 각종 시조집과 국학연구서 등 46권의 책을 남기고, 시조의 현대화를 이뤘다. ‘가고파’를 비롯, ‘성불사의 밤’, ‘옛동산에 올라’ 등 주옥 같은 시조를 지었고, 그것이 국민의 심금을 울리는 가곡으로 노래됐다. 일제의 한글 탄압 사건인 조선어학회사건으로 함경도 홍원경찰서, 함흥감옥에 1년간 수감됐다 풀려난 뒤 45년 초 전남 광양경찰서에 재수감됐다. 일제 치하 옥중 고통은 상상을 초월한다. 그런데 이런 업적이 유독 그의 고향 마산에서 제대로 평가되지 않고, 일부에 의해 배척당하고 있다.

    문화예술인들의 이름을 딴 기념관과 행사는 너무 많다. 박경리(통영, 하동, 원주), 이원수(창원), 김달진(진해), 서정주(고창), 유치환(통영), 이병기(익산), 채만식(군산), 구 상(칠곡), 이주홍·김정한(부산), 김유정(춘천), 이호우·이영도(청도), 정지용(옥천), 윤이상은 통영과 평양이다. 평양은 괜찮은가. ‘마산문학관’과 ‘노산문학관’의 브랜드 경쟁력의 차이는 설명할 필요가 없다. 왜 합포문화동인회는 31년째 ‘노산가곡의 밤’을 열고 있는가.

    이응백 서울대 명예교수는 맹자의 ‘盡信書(진신서)면 不如無書(불여무서)’라는 말을 인용했다. ‘덮어놓고 기록을 옳다고 믿으면 기록이 없는 것만 못하다.’ 친일 등 과거 기록을 들춰 조금이라도 흠이 잡히면 큰것 잡았다고 대서특필하는 것은 삼가야 한다는 말이다.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의 장지연이나 ‘선구자’의 조두남도 같은 맥락이다.

    공과(功過)를 함께 봐야 한다. 이승만과 3·15는 배치된다. 이승만 독재에 항거한 것이 3·15의거이고, 우리나라 민주화의 초석이다. 가고파와 3·15는 마산이 그 고향이다. 부족한 면은 교훈으로 삼되, 둘 다 잘 평가해야 한다. 다만 엄동설한 경기침체 시기는 피하고 시간을 두고 공론화하여 재정리하는 게 옳다고 본다.

    조용호 논설실장

  • < 경남신문의 콘텐츠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전재·크롤링·복사·재배포를 금합니다. >
  • 조용호 기자의 다른기사 검색
  •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플러스 카카오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