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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칼럼] 조연도(助演圖)의 아름다움

  • 기사입력 : 2009-01-16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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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몇 달 전 필자의 집무실에 어떤 교인이 작은 화분 하나를 가져다 놓았다. 결코 화려하지 않으며, 자연의 순박함이 그대로 묻어 있는 길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야생초이다. 실내의 몇 종류의 화초들에 비하여 아무 가치도 없는 소박함 그대로이다. 그러나 필자의 눈에는 어떤 다른 화초들보다 더 아름다워 보이며 소중하게 여겨진다. 그 이유는, 바람 부는 들녘에서 살아남으려는 의지와 투지의 생명력이 그 화초의 작은 잎 하나에서도 여실히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야생초가 주는 교훈을 가슴에 안고 문득 소파 위에 앉아 곤히 잠드신 팔순 노모를 바라보았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펄펄 날아다니시듯 하셨는데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신 듯 요즈음 와서 기력이 많이 쇠잔해지신 모양이다. 깊이 팬 주름살과, 구부정한 허리로 그래도 그냥 놀 수는 없다며 집과 교회의 쓰레기는 다 담당하시는 그 모습에 못내 가슴이 저미어 온다.

    웬일인가? 문득 어머니의 잠드신 주름진 얼굴에 야생화의 모습이 투영된다. 그러면서 자꾸만 ‘주연보다 더 아름다운 조연’이란 말이 떠오른다. 그렇다. 분명 이름 모를 야생초나, 어머니의 한평생의 삶은 객관적인 면으로는 주연이 아닌 조연의 인생이었다. 야생초가 화려한 화초들에 가려진 조연의 역할이듯, 어릴 때는 부모의 슬하에서, 젊어서는 남편을 위한 아내로서의 길에 충실했고, 이제 노년에는 새벽마다 아들인 필자와 후손들을 가슴에 품고 기도하는 가장 든든한 신앙적인 후원자가 되고 있다. 그야말로 한국 전통의 ‘삼종지도(三從之道)’의 길을 걸으며 주연 아닌 조연의 인생을 충실히 살아오고 계신다.

    그러나 지구상의 그 어떤 어머니도 다 그러하지만, 곤히 잠드신 노모의 얼굴은 그 어떤 주연의 화려한 미인도(美人圖)보다, 조연으로 이룬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으로 필자의 가슴에 그려진다. 그래서 내가 화가라면, 한 폭의 그림으로 멋진 조연도(助演圖)를 그리고 싶다. 내가 작곡가요 성악가라면, 바로 이 모습을 노래하고 싶어진다. 국화꽃을 바라보며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 같은 꽃이여”라고 했던 서정주 시인의 마음의 애잔함이, 야생초 위에 그려지는 어머니의 모습으로 내 가슴에 파문을 일으킨다.

    그런데 이것은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기도 하다.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고 말씀하시며, 제자의 발을 직접 씻겨 주시며 결국 인류 구원을 위해 십자가 지신 그분의 모습이야말로 진정한 조연도의 모습 그대로이다.

    그런 면에서 오늘 나와 너의 모습은 어떠한가? 계속 주연으로만 살고 싶은 집착과, 항상 내려놓지 못하는 주연의 자리에 연연하고 있지 않은가? 야생초와 어머니 그리고 그 위로 더 분명하게 그려지는 주님의 십자가의 조연도를 생각하며 이제 서서히 조연의 역할 속에서의 아름다움을 만들어가고 싶다. 아직은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를 말할 나이는 아니지만, 그래도 지나온 평생의 날과 앞으로의 남은 날들을 생각해 보면서 섬기며 사는 조연도를 그리게 해달라! 마음으로 조용히 무릎 꿇고 주님께 기도 드린다.

    이정희 진해영광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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