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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0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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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칼럼] 온건해질 수 있는 용기 - 장성진 (창원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 기사입력 : 2009-01-30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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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루의 계획은 동틀 무렵에 하고, 한 해의 계획은 봄에 하라고 하였다. 한국 사람들에게 봄은 설과 함께 찾아온다. 원래 설은 하루 이틀 바쁘게 쏘다니는 휴일이 아니라 오랫동안 진행되는 의례의 과정이었다. 정월 초하루에 시작되어 보름날에 마무리되는 종합 제전인 것이다. 절기로서 입춘도 대개 이 기간에 들어 있어서 더욱 설과 봄은 한동아리이다. 제대로 된 설 문화에는 천지에 대한 맺기와 풀기, 나와 남 사이의 분별과 융통, 풍요를 위한 놀이와 기원 등 사람 살이의 모든 면이 잘 엮여 있다. 그것을 통하여 진정으로 새로워지는 것이다.

    새해 첫날인 설날은 삼가는 날(愼日)이다. 지난해의 마지막 밤(除夕)을 뜬눈으로 보내면서 돌이켜 보고, 마침내 새날이 밝으면 엄숙한 마음으로 차례를 지내고 세배를 하면서 엎드린 자세로 한 해를 시작하는 것이다. 조심하고 준비하는 일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매일을 상징하는 동물에 따라서 어떤 날은 바느질, 외출, 다리미질을 삼가고, 어떤 날은 물 긷기, 실 잣기, 가축 돌보기를 권장하기도 한다. 성찰과 근신으로 시작한 새해가 하루하루 지나면서 활기를 더하여, 마침내 보름날이 되면 불놀이, 달집 태우기, 줄다리기, 연줄 끊기 등 한껏 고조된 마음과 몸짓으로 보낼 것은 보내고 사를 것은 살라 정화된 일상으로 돌아온다. 이 제전의 도중에, 성찰과 계획은 개인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사회적 합의로도 중요하다.

    용어조차 생소했던 뉴 밀레니엄을 외쳐대며, 지구촌 모두가 기대와 다짐에 들떴던 때로부터 어느덧 10년째로 접어든다. 국제적으로도 그렇지만 국내적으로도 지난 10년은 다짐에 비해서 반성과 모색이 턱없이 부족했던 시기이다. 정치 권력의 밀어붙이기와 탄압이 사라진 자리에 활발한 자기 주장과 거침없는 요구가 분출하고, 누구도 지레 움츠러들거나 쉽게 주눅 들지 않았다. 그러나 지나치게 소모적이다.

    정치 지도층과 지식인은 양극화된 가치의 어느 하나를 지향하면서, 선명성이 곧 도덕성인 양 정제되지 않은 말과 행동을 내보이기에 주저하지 않았다. 말이 모질어지고 비틀어졌다. 극단적이고 모욕적인 어휘를 선택하여 덮어씌웠으며 그럴수록 자기편 지지자들은 열광하였다. 말이 공소해지고, 그만큼 행동이 과격하고 무책임해졌다. 공손함이 겉치레로 치부되고, 신중함은 비겁함으로 치부되기 일쑤이다.

    경제를 비롯해서 사회 전반이 위기라고 진단하는 이들이 많다.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대부분 그렇게 말한다. 그러나 위기는 특별한 시기의 희한한 변종이 아니고 기회와 더불어 인간의 일상을 이루는 한 요소이다. 위기라고 하여 허둥대거나 망연자실할 수는 없다. 잘 생각해 보고, 그래도 어려우면 앞선 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이미 뉴 밀레니엄이란 분위기가 지구촌을 감쌀 때 세계적 석학들은 공통된 하나의 화두를 제시하였다. 이른바 소통과 융합이다. 분야와 분야, 지역과 지역, 사상과 사상의 소통은 석학들의 공통된 진단과 처방이었다. 한국의 지도층이 이 주장에 역행하고 있었을 뿐이다.

    이제는 좀 더 온건해져야 한다. 아니 용감해져야 한다. 양쪽을 아우르려고 하면 양시론자로 몰리고, 조금씩 양보하면 양비론자로 몰리는 위험을 감수할 만큼 용감해져야 한다. 자기의 주장을 가졌으되 다른 의견에 대하여 귀 기울이는 교양, 부정을 하면서도 상처를 남기지 않으려는 금도, 이것은 국제화 시대에 선택이 아니라 필수이다. 거부할 수 없는 이 시대의 요구이기 때문이다. 요설과 독설은 더 이상 승리를 위한 무기가 아니라 소외의 장막이 되어야 한다. 모질고 날카로운 거대 담론 속에 묻힌 작은 소리들, 이를테면 우리 사회 무료 급식 아동들의 처지가 얼마나 열악해졌는지, 공부방이란 데서 도움을 받는 청소년들의 생계에 어떤 어려움이 가중되었는지, 노인 교통사고의 증가 추세가 어떠하며 해결책은 무엇인지, 이런 문제에 대한 목소리에 좀 더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래야 겨울을 지나고 온 우리의 봄은 따뜻해질 것이다.

    금요칼럼

    장 성 진 창원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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