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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0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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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칼럼] 광고 홍수 속에서 카피 건져 읽기-이병승(시인)

  • 기사입력 : 2009-04-03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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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 의사와 상관없이 보기 싫어도 봐야만 하는 것들에는 무엇이 있을까?

    출근길 내리는 비나 눈, 사무실 앞의 가로수, 자동차, 보기 싫은 직장 동료?

    물론 그것도 맞다. 하지만 정말 보기 싫어도 보이고 봐야만 하는 것 중의 으뜸은 광고가 아닐까?

    요즘은 가히 광고의 홍수 시대다. TV, 라디오, 인터넷, 버스, 지하철, 빌딩의 옥외 광고…. 어디를 가도 쏟아져 나오는 광고에서 눈과 귀를 피할 길이 없다. 집으로 걸려오는 전화의 99%가 광고이고 메일함의 절반이 낚시성 광고다.

    언젠가 광고 관련 일을 하는 선배로부터 바다에 떠 있는 부표를 광고판으로 사용하겠다는 기획을 듣고 기겁을 한 일이 있다.

    이대로 가면 배트맨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하늘에 홀로그램으로 광고를 쏘아 올리거나, 달 표면을 광고판으로 활용하고, 떨어지는 낙엽도 광고 전단지로 쓰는 세상이 올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미래엔 자면서도 볼 수 있게 눈꺼풀 안에 광고를 새기게 되는 것은 아닐까?

    내가 광고를 보고 싶어 하지 않는 이유 중의 하나는 광고 속에 교묘하게 숨어 있는 부적절한 가치관 때문이다. 요즘 슬쩍 내 심기를 불편하게 한 광고는 모 자동차 광고였는데, “요즘 어떻게 지내냐는 친구의 말에…그랜저로 대답했습니다”라는 광고였다. 말하자면 ‘꼬우면 너도 돈 벌어라’인데 인간의 가치를 물질로, 오래된 친구의 우정마저도 자본주의의 부를 향한 경쟁 구도 안으로 몰아넣는 것 같아서 떨떠름했다.

    반면에 모 이동통신사의 광고처럼 ‘생각대로…(이루어진다)’라든가, ‘쇼를 하라!’ 등의 광고 카피는 제법 마음에 든다. 이 주문 같은 광고 안에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사상, 니체의 초인 사상이 들어 있고, 과거에 붙들려 괴로워하지도 말고 미래를 걱정하지도 말고 현재를 충실하게 살라는 메시지가 담겨져 있는 것 같다.

    지나친 확대 해석이 아니냐고 반문하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광고는 여러 가치관이 교묘하게 직조되어 있는 예술작품이다. 소비자의 마음을 낚아채기 위해서 고도의 계산된 테크닉이 사용되는 일종의 상업 예술이다.

    딘 R 쿤츠는 자신의 소설 <임상실험 designtimesp=5530>에서 역하지각(逆下知覺)을 이용한 살인사건을 다룬 바 있다. 역하지각 이론에 의하면 영화 중간에 인간의 눈이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짧은 컷의 광고를 삽입하면 무의식에 각인되어 실제 영화가 끝난 후에 구매행동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코카콜라가 이 기법을 자사 광고에 사용했다가 피소된 이후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기법이라고 한다.

    역하지각까지는 아니더라도 광고는 반복적으로 보게 되므로 그 광고에 내재된 가치관이 개인의 이기심과 소유욕만을 부추기는 것이라면 우리는 무의식중에 그렇게 세뇌될 수도 있지 않을까. 특히 청소년들에게 미치는 영향은 어떠할까?

    그래서 나는 광고가 보이면 그 자리에서 카피를 아예 내 마음대로 바꿔 읽곤 한다.

    ‘요즘 어떻게 지내냐는 친구의 말에…그랜저로 대답했습니다’를 보면서 나는 내게 묻는다. 오늘의 나를 대답할 수 있는 나의 삶의 가치는 무엇이냐고. 내가 대답할 내 삶의 자랑할 만한 열매는 무엇이냐고.

    ‘Everyday New Face!’라는 화장품 광고를 보면서 얼굴이 아니라 내면이 날마다 새롭게 거듭나는 내가 되자는 다짐을 하고, ‘I’m your energy!’라는 광고 카피를 보면서는 내가 사랑하고 힘을 줘야 할 친구를 생각한다. ‘당신을 위해 변하고 있습니다’라는 은행 광고를 보면서 사랑하는 이를 위해 내가 변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한다.

    말하자면 광고 카피를 자기계발서로 활용하는 것인데, 작심삼일이 특기인 내게는 제법 효과가 있다. 동시에 광고 안에 숨은 이데올로기를 읽는 재미도 있다.

    이처럼 보기 싫어도 봐야만 하는, 피할 수 없는 광고라면 그냥 즐기는 것이다. 카피 내 맘대로 바꿔 읽기처럼.

    오늘 내 눈에 가장 많이 뜨인 광고 카피는 ‘집 나가면 개고생이다’였다. 나는 그것을 ‘내 마음의 중심을 떠나면 망한다’라고 고쳐 읽는다.

    그리고 비비디바비디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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