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  |   유튜브  |   facebook  |   newsstand  |   지면보기   |  
2024년 04월 18일 (목)
전체메뉴

[작가칼럼] 청첩장의 무게 - 고동주(수필가 경남펜클럽회장)

  • 기사입력 : 2009-04-17 00:00:00
  •   
  • 청첩장은 ‘청춘을 묻어 버리는 한 구절의 비문(碑文)’이라는 글을 어디서 본 기억이 난다.

    풋풋한 젊음을 묻고 부부라는 인연으로 입문하는 의미를 너무 가볍게 보지 않았나 싶다. 청춘을 묻는 비문이라기보다 두 청춘 남녀가 하나의 희망찬 길을 여는 선언문이라고 해야 마땅하지 않을까.

    그런 선언문을 접하는 사람들로부터 뜨거운 갈채를 받았을 때, 그 갈채 속에 행복이 영글게 되리라.

    그러나 갈채 대신 못마땅하여 투덜대거나, 부담을 느껴 고민하는 사람이 많음을 어쩌랴.

    연중 결혼 시즌에 접어들면 곱게 단장을 한 청첩장이 나비처럼 연거푸 날아들기 시작한다. 언뜻 보기에는 고우나, 세금 고지서보다 위력이 강하다. 납기일은 물론 납부 시간과 장소까지 자유롭지 못하다. 어쩌다 지정한 장소에 나타나지 않으면 괘씸죄에 걸릴 수도 있다.

    대상이나 형편에 따라 다르겠지만, 나의 경우 일주일에 평균 대여섯 건, 한 달이면 스무 건도 넘을 때가 많다. 최소한의 체면치레만 해도 한 달 연금 수령액의 반액 이상이 날아가 버린다. 그렇게 되면 가계에 적신호가 오기 마련이다.

    그 정도도 공직자 퇴직연금 대상자라서 다행이지만, 그런 경우도 아닌 노년층은 얼마나 낭패스러울까. 전철에서도 노인은 공짜 대우를 받는데, 청첩장만은 고령도 아랑곳없다.

    가까운 친지나 지인(知人)일 경우는 당연하다는 생각으로 청첩장의 무게를 느끼지 못하나, 그렇지 않을 경우 상당한 무게를 느끼게 된다. 그런 무게로 갈등에 빠지는 때가 있다.

    청첩장을 보내는 사람은 한 사람이지만, 받는 입장에서는 다수인으로부터 모여들기 때문에 감당하기 곤혹스럽다. 더러 외면하면 되겠으나 길들여진 관행을 쉽게 덮어 버리지도 못한다.

    상대방의 입장을 고려함이 없는 얌체들의 모습도 각양각색이다.

    수십 년 동안 단 한 번도 연락이 없다가 청첩장으로 안부를 대신하는 얌체.

    자녀들이 많아 청첩장을 너무 잦게 보내는 얌체.

    청첩인 성명 자체가 생소하여 알아보지도 못하는 상대에게 보내는 얌체.

    청첩장을 한 사람이라도 더 보내기 위하여 과거에 관여했던 단체 명단을 입수하고 친분 여하를 불문하고 발송하는 안면에 철판을 깐 얌체.

    결혼식 일 년 전부터 지인들 주소를 추적하는 작업을 열심히 하는 극성파 얌체.

    이렇게 최대한의 수단을 강구하는 사람들은 상대가 결코 곱게 보지 않는다는 사실을 왜 모를까.

    이쯤 되면 청첩장 발송 방법이나 범위나 수단이 정상적인 한계를 넘었다고 볼 수 있다. 결혼식장에 모여드는 하객의 숫자로 가세(家勢)를 과시하려는 허세 하나만을 생각하다 보니 이런 부작용까지 발생하나 보다. 또 평소에 당했던 곤혹에 대한 일종의 보상 심리가 작용했을지도 모른다.

    최근에는 이렇게 잘못되어 가는 풍토가 못마땅하여 청첩장을 아예 내지 않는 분도 있다. 또 축의금 자체를 절대 사양하는 저명인사도 있다.

    친지나 가까운 지인끼리 모여서 다소 조촐하지만 오붓하게 축하의 분위기를 만들면 그 향기가 더 진할 것 같다. 그야말로 허식을 피한 순수 축하 분위기야말로 가치 있는 행복의 서곡이 될 수 있을 터.

    상부상조의 정신에 어긋날지 모르지만, 차라리 청첩장 없는 결혼 풍토가 바람직할 것 같다.

    청첩장이 청춘을 묻는 비문이 아닌, 잘못된 상부상조의 풍토를 묻어 버리는 비문이었으면 하고 혼자서 중얼거려 본다.

  • < 경남신문의 콘텐츠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전재·크롤링·복사·재배포를 금합니다. >
  •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플러스 카카오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