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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2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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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칼럼] 정태씨의 하루-김인혜(소설가)

  • 기사입력 : 2009-04-24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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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난해, 은퇴한 정태씨의 어깨는 축 처져 있다. 함께 놀아줄 친구도 없고, 아내 얼굴조차 보기 힘들어 요즈음 영 살맛이 안 난다. 아침 먹고 나면 마땅히 갈 곳조차 없어 막막하기만 하다. 처음엔 등산, 대중 사우나, 골프 연습장으로 모처럼의 여유를 만끽한다며 혼자 즐겼지만 수입도 없는 처지에 그 생활도 몇 달 버티지 못했다. 대학교수로 있거나 자영업을 하는 친구들은 주말에 가끔 모여 골프도 치고 술잔도 기울이며 회포를 푸는 것 같은데, 그들 속에 끼어들기도 쉽지 않다. 집 근처 시립도서관에 가서 신문을 뒤적이고 잡지 아니면 시, 소설을 읽으면서 시간 보내는 게 그나마 유일한 낙이다.

    눈만 뜨면 교회로 달려가 저녁 무렵에나 돌아오는 아내 따라 교회에도 나가보았지만 적응이 안 돼 몇 달 다니다 그만 두었다. 얼마 전에는 영 반기지 않는 눈치인 줄 알면서도 아빠의 권위로 밀어붙인끝에 딸이 나가는 스포츠센터에 갔었다. 운동 마친 후 맛있는 것도 함께 먹고 쇼핑도 하고 싶은데 딸년 역시 친구 만나러 간다며 정태씨를 따돌리기 일쑤다.

    집안의 어른 노릇은 차치하고라도 할아버지 턱수염을 매만지는 손자를 야단칠 기회조차 주지 않는 아들 녀석 또한 독신을 고집하고 있으니 그것마저 영 글러버린 듯싶다.

    며칠 전이었다. 아내가 친구들과 제주여행을 다녀오겠다는 걸 반대하다 곤욕을 치렀다. 여행지에서 걸려온 수화기 너머로 좀팽이, 젖은 낙엽이라고 놀려대던 그녀 친구들의 웃음소리가 아직도 귓가에서 맴돈다. 꼬박 사흘 동안 곰국에 맨밥 말아 먹고 있는데 TV에서 특집프로그램을 방영하고 있었다. 제목은 ‘신 노년, 일하는 은퇴’였다.

    다큐 속 미국 노인들은 자신과 같은 ‘뒷방 늙은이’가 아니었다. 게다가 그들은 무척 건강해 보이기까지 했다. 은퇴 후 일하고 싶은 만큼만 일하면서 편하게 살고 있다는 그들을 보면서 정태씨는 왠지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준은퇴’라. 자녀교육과 직장생활의 부담에서 해방돼 얻은 ‘진정한 자유’를 만끽하는 삶. 그것이 바로 정태씨가 원하던 ‘제2의 멋진 인생’이 아니었던가.

    아나운서는 아주 발랄한 멘트로 프로그램을 마쳤다. “가슴 속 꿈을 끄집어 내 실현시키며 삶의 완성을 향해 나가는 노인은 눈부십니다.” 정태씨는 그녀의 멘트를 뇌까리며 집을 나선다.

    도서관 입구에 들어서자 큼지막한 현수막이 눈에 들어온다. “책 함께 읽자- 4월 낭독 스케치” 도서관 주관을 맞아 다채로운 행사를 열고 있었다.

    오늘 밤은 여행을 떠났던 아내가 돌아오는 날이다. 출발 전, 아내는 ‘여보! 다음엔 꼭 당신과 함께 가요’ 그녀 특유의 콧소리를 내며 비행장으로 향했다. 물론 입에 발린 말이라는 걸 정태씨는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순간만큼은 정태씨도 몸속에 잠들어 있는 애달픈 그리움과 옛날을 향한 향수가 밀려왔다. 나무마다 꽃눈이 번져있을 쌍계사의 풍경도 눈에 선했다. 해마다 이즈음이면 몸살처럼 떠오르는 고두현의 시 한 편을 조용히 읊조리며 도서관 지하에 있는 구내식당으로 향한다.

    우동으로 점심을 때우고 열람실로 올라가, 도스토예프스키의 ‘백치’를 읽고 있는데 사서가 다가온다.

    “선생님! 부탁 좀 드려도 될까요. 오늘 밤 일곱 시부터 낭독회가 있는데 순서를 맡은 분이 갑자기 일이 생겼다는군요.”

    정태씨는 시계를 들여다본다. 제주항공 부산행 비행기 도착시간은 여덟시 십오분이다. 자동차도 집 열쇠도 정태씨 호주머니에서 딸그락거린다.

    낭독회는 막이 오른다. 객석도 꽉 들어찼다. 정적을 깨고 울리는 정태씨의 우렁찬 목소리에 모두 다 숨을 죽이고 있다. 얼떨결에 무대에 서게 된 정태씨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번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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