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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6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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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칼럼] 박쥐, 혹은 소나기를 기다리는 K씨의 경우-김륭(시인)

  • 기사입력 : 2009-05-22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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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얗게 목이 가늘고 긴 여자를 코흘리개 아이처럼 무릎 위에 앉히고 이야기를 시작할 것이다.

    엄마는 헌신적이었지. 아빠가 무능력한 건 천성이 쓸데없이 착했기 때문이야. 조금만 더 기다려. 한바탕 소나기가 세상을 휩쓸고 갈 때까지. 전기가 끊기고 집 앞 다리마저 떠내려가면 어때. 정치도 경제도 개판이야. 그러니까, 반 지하 사글셋방에 살더라도 집을 나가면 영혼마저 개고생이란 뜻이지.

    이른바 불황의 늪, 그저 하늘만 믿고 산 서민들의 한 주먹도 되지 않는 희망이나 행복마저 박쥐처럼 가만히 천장에 매달려 숨을 죽이지 않으면 불안한 이즈음의 시절을 빗대자면 어디가 좋을까.

    밤새 코가 삐뚤어지게 함께 술을 마신 K씨의 입을 빌리자면 끔찍하게도 도살장이다. 에이, 아무리 그래도 꽃피는 봄날인데, 그것도 5월 가정의 달인데….

    돼지독감으로부터 진화한 신종 인플루엔자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박연차에다 천신일에다 조류독감이나 돼지독감보다 더 치명적이고 끔찍한 이름들. TV를 켜도 신문을 봐도 난리도 아니다. 이쯤 되면 천둥 번개를 동반한 소나기를 기다리며 허름한 소줏집에 들어앉은 K씨에게 잔을 부딪칠 만하다.

    이대론 못 살겠다며 하루가 멀다 하고 들려오는 자살 소식을 배경으로 지들끼리 지지고 볶는 정치판과 있는 놈은 살고 없는 놈은 죽으라는 식의 경제논리 앞에서 K씨가 하늘에 매단 박쥐는 버틸 수 있을까.

    불안하고 불길하기 짝이 없는 시절, 그래서 ‘엄마’인가? 작가 신경숙을 통해 발화한 이즈음 대중코드 속의 엄마를 박쥐의 눈으로 올려다보면 한줄기 소나기 같은 것은 아닐까. 서로의 피를 나눠 정체성을 찾는 탈출구. 손을 뻗었을 때 늘 그 자리에 있는 엄마. 그렇다. 엄마는 그냥 엄마이기 때문에 믿는다. 제 아무리 도살장이라도 엄마를 통해 다시 태어나 살아낼 수 있는 것이다.

    K씨의 술잔을 프랑스 소설가 에글로프에의 ‘도살장 사람들’에게 돌린다. 도살장에서 일하는 소설 주인공 ‘나’는 K씨처럼 마을을 떠나 새로운 삶을 살고 싶다. 폐수 처리장과 활주로, 폐차장으로 둘러싸여 있고 늘 안개가 자욱한 마을. 서풍이 불면 달걀 냄새가 나고 동풍이 불면 유황냄새에 목이 콱 막혀 견딜 수 없는 마을이지만 탈출은 불가능하다.

    소설은 ‘나’의 이런 악조건들을 지금 우리의 삶과 대비하도록 유도한다. 먹어야 산다는 점에서 우리 역시 도축의 공범이고 어쩌면 각자의 도살장에서 무언가를 죽이며 살아가는 것 아닌가. 결국 소설 주인공을 둘러싼 여러 악조건은 K씨나 내가 가진 것이다. 소설은 이런 공감을 바탕으로 인간다운 삶을 탐색한다. 직장에서 사고를 당한 친구의 죽음을 알리기 위해 그의 아내를 찾아갔다가 차마 알리지 못하고 바보처럼 돌아오는 주인공이 바로 K씨이고 당신은 아닌가.

    도살장 사람들이 가진 삶의 궤적을 따라가다 보면 문득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진다. 파리마저 죽이지 못하는 내 속에, 내가 사랑하고 나를 목숨보다 아끼는 엄마와 가족, K씨 같은 술친구들 사이에 탈출구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 중요한 것은 거창하게 민족이니 역사를 떠벌리는 권력자들과 그 주변에 빌붙어 기생하는 일부 계층의 힘이 아니다. 일상의 소소함과 인간적인 감정이 거짓 없이 만들어 내는 눈물겨운 행복이나 희망이다.

    이 나라 정치판이 말해 주듯 서민들의 모습이 제거된 역사란 얼마나 폭력적인가. K씨는 지금 우두커니 목이 가늘고 긴 여자를 폭삭 늙은 엄마처럼 무릎 위에 앉히고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다. 소나기는 눈앞의 어둠을 쪼개서 그 벌어진 틈으로 죽비처럼 쏟아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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