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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0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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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중이 남긴 외로움과 그리움의 흔적 찾기

★ 남해 노도 여행

  • 기사입력 : 2009-05-28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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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포 김만중이 유배 생활을 했던 남해 노도 초옥터. 그가 생의 마지막을 보낸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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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포의 시신이 잠깐 묻혔던 허묘.



    서포가 직접 팠다는 우물터.

    노도 마을 왼쪽 산모퉁이를 끼고 20여분 걸으면 김만중 초옥터·우물터에 다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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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망한 세 섬은 바다구름 가에 있고/ 방장, 봉래, 영주가 근접해 있도다/ 숙질제형이 나누어 점하고 있으니/ 남들이 신선처럼 바라볼 만하구나.

    ‘서포연보’에는 김만중이 남해에 도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형 김만기의 맏아들인 광은공 김진구(1651~1704)가 제주도로 유배되고, 죽천공 김진규(1658~1716)는 거제도로 유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깊은 슬픔에 잠겨 `재남해문질배절도’(在南海聞侄配絶島)라는 시를 읊었다고 한다.

    당파 싸움 등 어지러운 정치판에 휘말려 세 차례나 유배를 당한 서포 김만중(1637~1692).

    5월의 햇살이 따갑게 느껴지는 25일, 서포 김만중의 파란만장한 삶을 찾아 남해 노도로 여행을 떠났다.

    남해대교를 건너 19번 국도를 따라 남쪽으로 가다 보니 이동면을 만나고 다시 상주면 초입에 이르면 언덕 아래 음푹 들어간 곳에 작은 포구가 나온다. 바로 벽련 마을이다.

    벽련 마을로 내려서는 길 입구에 서자 ‘서포 김만중 선생 유배지 노도 입구’란 팻말이 눈에 띈다.

    벽련 마을 포구에서 바라보면 왼쪽에 치우쳐 삿갓처럼 떠 있는 섬이 노도다. 원래 이 섬은 그 모양새가 삿갓과 닮아 ‘삿갓섬’이라 불렸는데 임진왜란 때 이 섬에서 자란 나무를 베어 배를 젓는 노를 많이 만들었다고 해 그때부터 ‘노도’라는 새로운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일행은 노도 반장 이석진씨의 도움으로 통통배(?)에 몸을 실었다.

    ‘무거운 발걸음으로 한양에서 천 리 길을 걸어와 다시 배를 타고 노도로 향하는 김만중의 심정은 어땠을까…. 살아서 언제 다시 바다를 건널 수 있을지 모를 유배길에서 그의 마음은 얼마나 착잡했을까….’ 배를 타고 가는 동안 깊은 상념에 잠겨 본다.

    뱃길로 5분여 거리의 지척이지만 300여년 전 서포는 노를 저어 이 바다를 건넜을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아련히 저려 온다.

    노도 선착장에 도착해 마을 입구로 들어서는 곳에 ‘서포김만중선생유허비’(西浦金萬重先生遺墟碑)가 세워져 있다. 높이 2.2m, 너비 1.8m의 이 유허비는 1988년 경남지구 청년회의소 회원들이 세운 것이다.

    13가구 17명이 거주하는 노도 마을은 한산하다 못해 적막하기까지 하다. 주민들의 수가 적어서라기보다 서포의 쓸쓸함이 곳곳에 남아 있어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마을 안길을 벗어나 노도 마을 왼쪽 산모퉁이를 끼고 20여분을 돌아가니 서포의 흔적이 남겨진 초옥터와 우물터, 허묘 등을 만날 수 있다.

    갈림길에서 오른쪽 언덕을 따라 돌계단을 오르니 서포의 시신이 잠시 묻혔다는 허묘에 이른다. 표석에는 ‘김만중 선생 무덤자리. 서포 선생이 돌아가신 후 숙종 19년(1692년) 4월부터 동년 9월까지 묻혔던 곳이다’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친족들에 의해 서포의 시신은 육지로 이장되고 묘 터만 남았다. 300여년의 세월이 흘렀는데도 이곳엔 나무 하나 자라지 않고 잡풀만 드문드문 자라고 있다. 한이 서린 자리라 나무조차 그곳에 뿌리내리기를 두려워 하는 것일까?

    다시 계단을 내려와 산허리를 돌아가니 서포 김만중의 초옥터에 이른다. 그가 생의 마지막을 보낸 곳이다. 인근에는 서포가 직접 팠다는 우물터가 있다. 오랜 세월 방치된 우물터는 볼품없었지만 돌 사이로 ‘졸~졸~졸’ 흐르는 물줄기는 시원해 보인다.

    서포 김만중은 세 번에 걸쳐 유배 생활을 했는데 주로 직언(直言) 때문이었다.

    서포가 첫 번째 유배를 당한 것은 현종 14년(1673년). 직언을 하다 임금의 노여움을 사서 강원도 금성(4개월)으로 귀양을 갔다. 두 번째는 숙종 13년(1687년) 희빈 장씨 일가를 비난했다가 평안도 선천(1년2개월)에 유배되었고, 세 번째는 인현왕후 폐비 반대에 앞장서다가 다시 희빈 장씨의 미움을 사서 남해 노도(3년 남짓)로 유배된 것이다.

    반복된 유배 생활에도 서포는 어머니를 그리워 하는 지극한 사모의 정으로 밤을 지새워 글을 썼다고 한다.

    김만중이 노도 유배 중에 쓴 소설 ‘구운몽’은 효자로 소문난 그가 어머니를 생각하며 하룻밤 만에 쓴 것이라고 한다. 여덟 명의 선녀와 온갖 부귀영화를 누렸으나 그것이 하룻밤의 꿈이었음을 깨닫는다는 이야기다.

    ‘사씨남정기’는 ‘구운몽’의 환상적인 주제와 달리 철저하게 현실에 바탕을 두고 있다. 양반 사대부의 정부인이었던 사씨가 자식을 낳지 못해 교씨라는 첩을 맞아들인 후 온갖 고생을 하다 나중에 교씨의 악행이 탄로나 처형되고 남편과 다시 만나 백년해로(百年偕老)한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김만중은 노도 유배 생활 10개월이 채 안돼 어머니 윤씨 부인의 사망 소식을 접하고 그 충격과 풍토병으로 1692년(숙종 18년) 4월 유배지에서 56세로 생애를 마감했다. 남해로 유배된 지 햇수로 4년, ‘천극절도지명’을 받은 지 3년 1개월 23일이 되는 날이다.

    노도를 떠나며 배에서 옅은 운무에 싸인 섬을 바라보니 어머니를 그리워 하며 깊은 시름에 잠긴 서포의 모습이 떠오르는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든다.

    한편 남해군은 지난 13일 남해읍 남변리 일원에 유배문학의 체계적 연구와 문학 인프라 구축을 위한 남해유배문학관 건립 공사에 들어갔다. 내년 4월 준공 예정으로 전시실과 강당, 수장고 등과 야외 체험시설, 야외공원 등 각종 부대시설을 갖추게 된다. 군은 앞으로 역사 속에 잠자고 있는 유배 인물과 문화적 자산을 발굴하는 등 문학과 관광을 연계한 새로운 관광 인프라를 구축할 계획이다.

    글·사진=이준희기자 jhlee@knnews.co.kr

    ▲서포 김만중(金萬重, 1637∼1692)

    조선시대 정치가이며 문인이다. 자는 중숙(重叔), 호는 서포(西浦), 본관은 광산(光山), 시효는 문효(文孝)이다. 조선 숙종 때 문관으로 인조 15년(1637년) 태어나서 숙종 18년(1692년)에 세상을 떠났다.

    유복자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어머니의 엄격한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현종 6년에 정시 문과에 장원급제해 공조판서, 홍문관 대제학, 대사헌 등을 지냈다.남해 노도에서 3년여의 유배 생활 끝에 5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작품으로는 국문소설 ‘구운몽’, ‘사씨남정기’ 등이 있으며 그 밖에 ‘서포만필’, ‘서포집’ 등이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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