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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2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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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백의종군로 (상) 합천·산청지역

충무공이 나라 걱정하며 걸었을 길을 따라…

  • 기사입력 : 2009-06-11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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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순신 장군은 산청 단성에 도착해 박호원의 농사짓는 종의 집에서 하룻밤 유숙했다. 지금은 흔적을 찾아볼 수 없지만 박호원의 재실 ‘이사재’는 남아 있어 그 근처에 농막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산청 신등면 단계천 변 이충무공 추모공원.


    단성현청의 주춧돌이었다고 전해지는 초석이 옮겨져 있는 산청 단성초등학교.



    이순신 장군이 42일간 머물렀던 이어해의 집에 관해 10대 후손인 이종규옹이 설명하고 있다.


    나라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린 영령들의 넋을 위로하는 호국보훈의 달 6월.

    기찬 주말은 임진왜란 당시 원균의 음해와 왜군의 모략으로 파직당해 백의종군했던 이 충무공의 백의종군로를 찾았다.

    관직을 박탈당한 신분에도 나라를 구하기 위해 나선 이 충무공의 행로와 유숙지, 쉼터 등 곳곳에서 고뇌한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정유년(1597년) 4월 1일 출옥한 이순신 장군이 당시 초계(현 합천군 율곡면)에서 진을 치고 있던 도원수 권율의 휘하에서 `백의종군’하라는 어명을 받고 서울을 출발 아산, 남원, 순천 등을 거쳐 하동(5월 26일)에 도착한 후 산청, 합천에서 지낸 행적을 살폈다.

    또한 원균의 대패(7월 18일)로 전황이 다급해지자 도원수 권율과 논의해 합천, 산청, 진주, 하동, 사천을 지나 하동 구노량에 도착, 전황을 살핀 후 돌아오는 길에 ‘삼도 수군 통제사’로 재수임 받으면서 백의종군이 종결되는 시점(161.5km)까지를 상, 하편으로 나눠 소개한다.

    일행은 지형상 찾는 이의 편의를 위해 이순신 장군이 장기간 머문 합천 이어해家, 삼가현청, 개벼리, 도원수 진과 산청 단성 박호원의 집, 단계천 변, 동산산성(백마산성), 단성현청 등을 먼저 찾았다.

    이날은 (사)21세기 이순신연구회 유명규 사무총장, 조정민 홍보과장, 경남도청 김종임 이순신프로젝트 사무담당관, 조종명 문화관광해설사 등이 함께했으며 이어해 家의 10대 후손인 이종규(72)옹과 합천 율곡면 낙민2리 매실마을 통장 이강중(65)씨가 도움을 줬다.

    1597년

    6월 1일- 산청 박호원의 집 유숙

    6월 2일- 산청 단계천 변서 아침밥

    6월 2.3일- 합천 삼가현청 유숙

    6일~7월 17일- 이어해家 유숙

    ▲산청

    창원을 출발해 2시간여 만에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 이사재에 도착한 일행은 인근 남사예담촌의 아름다운 돌담길과 기와집의 고풍스런 풍경에 흠뻑 빠져 간이 멈춰선 듯한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이곳은 지금으로부터 412년 전인 1597년 6월1일 ‘백의종군’ 이 충무공이 도원수 권율을 찾아 하동현청을 떠나 청수역(하동군 옥종면 정수리) 시냇가 정자에 이르러 말을 쉬게 한 후 날이 저물자 송월당 박호원의 농사짓는 종의 집에서 유숙을 한 곳으로 전해지는 곳으로 산청 단성 땅과 진주 땅의 경계가 있다.

    지금은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으나 박호원의 재실이 존재하는 만큼 이 근처에 종이 기거하는 농막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사재’는 마을 앞산인 ‘이구산’과 마을 앞을 흐르는 강 ‘사수’의 지명을 빌려 강과 산이 있는 재실이라는 뜻으로 ‘이사재’라 불렸다고 조종명 문화관광해설사는 전한다.

    한낮의 무더위에 길을 재촉해 찾은 곳은 이 충무공이 아침밥을 지어 먹은 곳으로 알려진 산청군 신등면 단계리 ‘단계천 변’.

    이 충무공은 이튿날(6월 2일) 아침 일찍 길을 나서 30여 리 떨어진 단계천 변에서 밥을 지어 먹었다고 한다. 현재 이곳에는 이 충무공의 백의종군을 기념하는 ‘이 충무공 추모공원’이 조성돼 있다. 공원에 들어서니 위엄을 갖춘 이순신 동상과 거북선이 일행을 맞는다. 이 충무공은 삼가로 가기 위해 이곳에서 아침밥을 지어 먹은 후 단계천을 건너 현재 두곡마을에서 간곡리로 넘어가는 고개인 다실재를 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어 이 충무공은 남해안 전세를 살피기 위해 7월 19일 단성현으로 가던 중 현 산청군 신안면에 있는 동산산성(백마산성·800m)에 올랐다.

    이 충무공은 원균이 이끈 수군이 대패하였다는 소식을 접하고 도원수 권율과 숙의 끝에 ‘내가(이 충무공) 직접 해안지방으로 가서 듣고 본 뒤에 방책을 정하겠다’는 결론을 내리고 7월 18일 초계현 모여곡(毛汝谷·현 율곡면 낙민리 매실마을)을 떠나 남해안으로 가던 중이었다.

    동산산성은 삼면이 절벽으로 이뤄진 천혜의 요새로 정상부에는 군량미 창고와 못이 있었다고 한다.

    조 문화관광해설사는 “임진왜란 당시 우리 군의 물 부족 사태를 노린 왜군이 장기전을 펼치자 지혜로운 장수가 말 한 필을 몰아 바위 끝에 세우고 쌀을 퍼서 말 등에 뿌렸다. 멀리서 보기에 마치 더위에 지친 말을 찬물에 씻기는 모습 같아 왜군이 포위망을 풀고 퇴각했다”며 “이때 산성에 있던 사람들과 말이 신안강(경호강)에 내려와 마신 물이 세 치나 줄었다고 전하며 이때부터 산성의 이름을 ‘백마산성’이라 불렀다”고 설명한다.

    이 충무공은 동산산성을 둘러본 후 강 건너 단성현청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되는데 단성현청 자리에는 현재 단성초등학교가 들어서 있다. 운동장 한편의 고목나무 주변에 단성현청에 사용되었던 주춧돌이 10여개 놓여져 있다. 인근에는 늠름한 모습의 이 충무공 동상과 ‘충무공 이순신 백의종군 행로지’ 표지석이 들어서 있다.

    ▲합천

    합천은 이 충무공이 백의종군 기간 중 가장 오래 머물렀던 곳이다. 합천은 도원수 권율 장군의 진이 있었던 곳으로 6월 2일 저녁 삼가현청(현 삼가면사무소)에 도착해 7월 18일까지 46일간 머물렀으며 이 가운데 42일을 초계(현 율곡면 낙민리 매실마을) 이어해家에서, 이틀은 문보家에서 지냈다고 난중일기에 나타난다.

    이 충무공이 6월 2일 합천에 들어와 유숙한 삼가현청은 사라지고 지금은 삼가면사무소가 자리하고 있지만 앞마당에는 ‘이순신 장군이 정유년에 권율 휘하에서 백의종군하기 위해 당시 원수부가 있던 합천 초계로 향하던 중 6월 2일·3일을 이곳에서 유숙하였으며…, 다시 초계를 떠나 노량으로 향하던 중 7월 18일 이곳에서 수행원들과 유숙하며 나라의 장래를 걱정했다’는 사연이 담긴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당시 이곳에 삼가현청이 있었다는 증거로 인근에 부속건물인 ‘기양루’가 남아 있다.

    합천 땅에 도착한 이 충무공은 나흘 만에 도원수 권율을 만난 것으로 보인다. 당시 도원수 권율의 진이 있었던 곳은 황강을 중심으로 현재 율곡면 낙민정과 낙민원, 적포 들녘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수로를 이용해 합천·거창으로 진격하는 왜군을 막기 위해 이곳에 진을 친 것 같다.

    매실마을 통장 이강중씨는 “이 충무공이 권율의 진을 살핀 후 아주 좋은 곳에 진을 치고 있다는 내용과 백마산성과 개벼리를 중심으로 황강만 잘 지키면 만 명이라도 지나가기 어렵다는 내용이 6월 4일 난중일기에 기록돼 있다”고 말한다.

    삼가현청을 출발해 초계(현 율곡면)의 권율 진에 도착한 이 충무공은 인근 문보의 집에 짐을 푼 후 이틀을 지냈고, 이후 3일째부터는 이어해의 모친(당시 미망인)을 다른 곳으로 모신 후 이어해의 집을 도배하고 군관 휴식소도 두 칸 만들어 지낼 곳을 마련했다고 한다. 현재 문보의 집은 어디인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이어해家에는 13대 후손인 이윤영씨가 살고 있다.

    글·사진=이준희기자 jhlee@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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