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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2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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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세 침략의 흔적 따라 군항도시 역사여행

반나절이면 충분한 진해 문화유적탐방

  • 기사입력 : 2009-08-27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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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33년(신라 흥덕왕 8년) 무염국사가 창건한 진해 팔판산 자락의 성흥사.

    맑은 하늘과 시원한 바람이 가을을 재촉한다.

    따가운 햇살에 들녘에서는 곡식들이 알알이 영글어가고 농부들의 얼굴엔 웃음꽃이 피어난다.

    가을의 초입에서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마음에 벌써부터 엉덩이가 들썩여진다면 자녀들과 함께 인근 문화유적지를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

    군항의 도시 진해는 오랜 세월 외세의 침략이 끊이지 않았던 개항지인 만큼 문화·역사 유적지가 곳곳에 숨어 있다.

    일제의 침략을 엿볼 수 있는 진해탑을 비롯해 왜군의 전략적 요충지로 이용된 안골·웅천왜성 등 다양한 문화유적지가 지척에 널려 있어 아이들의 훌륭한 산 교육장으로 충분할 것이다.

    ☆진해탑- 日 전승기념탑 허물고 1967년 건립

    진해의 문화유적지를 둘러보기 앞서 제일 먼저 찾은 곳은 진해 시가지를 한눈에 둘러볼 수 있는 ‘진해탑’.

    제황산(帝皇山·해발 90m) 정상의 진해탑은 1927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세운 전승기념탑이 있었던 곳이다. 1929년 5월 27일 일본이 무적함대 러시아 발틱함대를 대파한 후 이를 기념하기 위해 산 정상을 완전히 깎아 대형 탑을 세웠다. 하지만 1945년 조국 광복과 함께 전승기념탑을 허물어버리고 1967년 우리 해군의 위용을 상징하는 군함의 마스터를 본떠 진해탑(높이 28m)을 건립했다.

    진해탑을 오르는 방법으로는 365계단을 이용할 수도 있지만 지난 3월 개통한 모노레일카를 이용하면 훨씬 수월하다.

    40인승의 모노레일카에 올라 시속 5km 속도로 5분여 오르다 보면 어느새 정상이다. 170여m 짧은 노선이지만 정상을 오르는 동안 진해시의 아름다운 비경을 조망할 수 있다. 진해탑 동쪽 출입구로 오르는 75개 계단은 당시 일제가 만들었던 그대로 보존돼 있는데 아래쪽 계단 37개와 위쪽 계단 38개는 러일전쟁이 있었던 일본 메이지 37년(1904년)에서 메이지 38년(1095년)을 상징한다.

    ☆진해우체국- 일제 때 지어진 러시아풍 목조건물

    진해탑 입구에서 불과 100여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진해우체국(사적 제291호)은 ‘Y’자 형태의 3방도로 중앙에 조성된 삼각형의 러시아식 단층 목조건물이다. 1912년 10월 25일 준공하여 같은해 11월 15일 진해우편국이 이전해 2000년까지 우체국 청사로 사용해 왔지만 지금은 사적 제291호로 지정되면서 폐쇄돼 문이 굳게 닫혀 있다.

    지붕은 동판으로 덮고 사방에 동재로 난간을 둘렀으며 반원형 채광창(햇빛을 받기 위하여 내는 창문)을 설치했다.

    건물의 양식은 러시아풍의 절충식 근대건축인데 정면 입구의 양측으로 세운 강한 배흘림이 있는 투스칸오더(Tuscanorder)의 두리기둥으로 당당한 외관을 보이고 있어 근대화 시기의 일본이 서양의 건축양식을 도입해 정착되어 가던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웅천읍성- 1439년 일본인 불법이주 막으려 축조

    웅천읍성(도기념물 제15호)은 조선 세종 21년(1439)년에 만들어졌다. 1407년 일본과의 개항으로 일본인의 불법이주가 많아지자 이를 막고 읍면을 보호하기 위하여 읍성을 축조했다고 한다. 문종 원년(1451)에는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동·서·북에 수로를 만들어 성 일부를 확장했다.

    현재는 성의 동벽만이 동문지(東門址)와 함께 거의 완전하게 남아 있으며, 서벽과 남벽은 그 일부가 남았으나 북벽은 철거되어 거의 흔적도 남아 있지 않다. 동문지의 너비는 4m이며 성벽 높이는 5∼8m, 두께는 3m이다. 현재 남아 있는 총 길이는 500m, 동벽 북단의 남쪽 100m쯤에 누지(樓址)도 남아 있다. 현재 웅천읍성 복원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다.

    ☆웅천왜성- 임진왜란 때 왜군이 쌓았던 성

    웅천왜성(도기념물 제79호)은 웅천읍성에서 불과 차량으로 5분여 거리의 남문동에 위치해 있다. 풀내음 맡으며 호젓한 산길을 20여분 오르다 보면 산등성이를 따라 허물어진 왜성이 나타난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장기전에 대비해 우리나라에 쌓았던 18개의 성 가운데 하나인 웅천왜성은 지형의 특성상 북쪽으로 웅포만을 끼고 있어 왜군들이 수백 척의 함선을 정박시키기에 가장 적당했을 뿐만 아니라 안골포, 가덕도, 거제도 등에 주둔하고 있는 왜군과의 연락이 용이했던 곳이다. 또한 본국과의 거리도 가까워 군사 주둔지로 유리한 지역이어서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는 이곳에 진을 치고 왜군의 제2기지로 사용했다고 한다.

    지금은 신항만 공사 등으로 앞바다가 매립됐지만 이곳은 한눈에 가덕도, 수도, 연도, 거제도 등 인근 해역을 감시할 수 있을 정도로 경관이 뛰어나다.

    ☆안골포 굴강, 웅천 안골왜성- 조선시대 군선 정박했던 군사시설물

    진해 안골포 굴강(掘江·도 기념물 제143호)은 조선시대 군선이 정박해 선체를 수리하고 군수품을 조달하기 위해 만든 군사시설물로 지금의 방파제 또는 선착장과 같은 역할을 하던 곳이다.

    현재 전국에 남아 있는 5~6개의 굴강 유적은 대부분 그 흔적만 남아 있어 형태를 알아보기 어렵지만 안골포 굴강은 자연석으로 쌓은 석축의 윗부분이 허물어지고 하부가 매몰되기는 했지만 원래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있는 유일한 굴강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따르면 제포진(진해)에 소속된 안골포영에 수군만호가 이끄는 조선 수군이 주둔하였는데 둘레 56m(171.4척), 높이 3m(10척)의 성벽과 안에 우물과 시내가 있는 성(城)이 있었다고 기록돼 있다. 또 임진왜란 때 왜군들은 안골포 위의 높은 곳을 택해 일본식 성곽을 쌓고 1593년경 왜장 와키사카가 주둔하였다고 한다.

    ☆성흥사 대웅전- 팔판산 자락에 833년 무염국사가 창건

    진해 대장동 팔판산 자락의 성흥사(유형문화재 제152호)는 833년(신라 흥덕왕 8년) 무염국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이 절은 한때 500여명의 승려가 머무를 정도로 큰 절이었다고 하나 이후 여러 차례의 화재로 인해 여러 곳으로 옮겨다니다 1789년(정조 13년)에 지금의 자리에 절을 다시 지었다.

    절의 창건과 관련해 설화가 전해진다. 흥덕왕 제위 초(初)에 이 지방에 왜구의 침략이 잦아 왕이 몹시 근심하였는데, 어느 날 왕의 꿈에 백수노인이 나타나 지리산에 있는 도승(道僧)을 불러 왜구를 평정하게 하라고 말했다. 왕은 곧 사신을 보내 도승을 모셔 오게 했다. 도승이 팔판산에 올라 한 손에 지팡이를 잡고 다른 한 손으로 자신의 배를 몇 번 두드리니 뇌성벽력이 천지에 진동하므로 왜구들은 신라 군사들의 함성으로 착각하고 달아났다. 그 도승이 곧 무염이었으며, 왕은 무염에게 재물과 전답을 시주하여 절을 창건하게 했다고 한다. 고즈넉한 산사의 풍경이 찾는 이의 마음을 평온케 한다.

    글·사진=이준희기자 jhlee@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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