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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28일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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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칼럼] 누구를 위한 독서의 계절인가?- 정일근(시인)

  • 기사입력 : 2009-09-11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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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실종된 여름의 자리를 밀어내며 가을이 불쑥불쑥 찾아오고 있다. 필자가 책 읽고 글 쓰는 은현리(銀現里) 우거인 ‘청솔당’에 귀뚜라미 소리가 하루하루 요란해지고 있다. 얇은 벽 사이로 들려오는 귀뚜라미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여름에 받아 놓고 읽지 않은 책들에게 자연스럽게 손이 간다.

    가을을 비유하는 가장 익숙한 말이 ‘등하가친’(燈下可親)이다. 등불을 가까이 한다는 이 말은 밤에 책 읽기 좋은 계절이 왔다는 뜻이다. 밤이 서서히 길어지는 시간과 동무하기에 책처럼 좋은 친구가 없다. 바야흐로 ‘독서의 계절’이 오고 있다.

    그런데 해마다 되풀이되는 독서의 계절의 주체는 대부분 ‘1020’ 세대에 맞춰지고 있다는 것이 큰 문제다. 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집에서는 자녀들에게 책을 읽어라 권하고 책을 선물한다. 해마다 여러 차례 ‘독서 강연회’에 참석해 봐도 그랬다. 학생들이 아니면 자녀들 독서지도에 관심이 많은 부모들이 청중의 대부분이다.

    국가의 독서정책도 그 눈높이에 맞춰져 있다. 올해 문화관광부가 야심차게 추진하고 있는 ‘책 함께 읽자’도 마찬가지다. 함께 읽자는 대상이 모호하다. 필자도 몇 차례 초대받아 독자들을 만나 봤지만 관객들이 극히 제한적이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결론을 미리 말하자면 ‘나이 드신 부모님’ 또는 ‘어르신’을 위한 독서정책이나 행사가 부재하다는 것이다. 다른 부문도 마찬가지겠지만 독서의 계절에 대한민국 노인들은 언제나 소외당하고 있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무료급식장소에서 그곳에 자주 오시는 분들을 위해 ‘효(孝)시’를 읽어 주는 시인들의 행사가 있었다. 처음엔 무슨 효과가 있을까 부정적이었지만 기대 이상의 모습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렇게 진지하게 시에 귀를 기울일 수 없었다. 그러다 관객인 노인들 사이에서 먼저 울음이 터지기 시작했다. 마지막엔 시를 낭독하는 시인이나 참석하신 노인들이나 함께 하나가 되어 펑펑 우는 모습으로 끝이 났다. 행사를 마치고 나서 많은 분들이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시를 읽어 주어 고맙다’ ‘참 오랜만에 시를 들었다’는 감사의 말씀을 하셨다.

    필자의 어머니도 그러하시다. 자주 시집들을 읽으시는데 활자가 작아 돋보기를 쓰고 읽으신다. 돋보기로 읽는 책은 페이지가 쉽게 넘어가지 못한다. 몇 편 읽으시고 돋보기를 벗고 쉬다가 다시 읽곤 하신다. 해서 어느 날 아이들을 위한, 활자가 큼직큼직하고 그림이 들어있는 동화책을 권해드렸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어머니는 돋보기도 쓰지 않으시고, 작은 활자에 대한 두통도 호소하지 않으시고 단숨에 책들을 읽어내시는 것이 아닌가. 어머니는 읽은 책의 독후감을 들려주면서 아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셨다. 그 모습에 필자는 어머니에게 불효를 하고 있었다는 생각에 참 많이 미안했다.

    우리에게 늙으신 부모는 어떤 분인가? 우리가 어렸을 때 책 속에 길이 있다며 책을 사서 읽히신 분들이 아닌가. 우리는 우리 아이들에게 책을 열심히 사주면서 노년을 외롭게 사시는 부모님께는 ‘좋은 친구’인 책을 선물하지 않는가? 그분들을 위한 전문적인 책을 만드는 출판사는 고사하고, 그런 독서정책이나 독서행사는 왜 없는가?

    올 가을엔 부모님께 책을 선물하자. TV를 벗 삼아 지루한 시간을 보내는 노인들을 독서행사장의 주빈으로 모시자. 어린 시절 그분들이 우리들의 잠자리 곁에서 책을 읽어주셨듯이 이제 우리가 그분들의 잠자리 곁에서 책을 읽어드리자. 아이들이 읽고 난 그림동화책을 노인정이나 노인모임에 선물해 보자. 이 가을부터라도 행정과 문학단체들이 그런 부문에 많은 지혜들을 모아 보자.

    헤밍웨이 소설에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For Whom the Bell Tolls)’라는 작품이 있다. 그 제목에 빗대어 묻고 싶다. ‘누구를 위한 독서의 계절인가?’

    정일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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