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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작품을 말한다 (13) 서양화가 권영호 화백

“물고기는 자유를 갈망하는 나 자신을 그린 것”

  • 기사입력 : 2009-12-17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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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권영호 화백이 자신의 작업실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부인 노규자씨와 함께 차를 마시고 있는 권영호 화백.


    권영호 화백이 작품활동에 열중하고 있다.

    △유준상 평론가: “권 교수님, 그림 속에 등장하는 물고기는 평생 처음 보는 물고기입니다.”

    -권영호 교수: “그래요, 어떻는데요?”

    △유 평론가: “물고기 같으면서 물고기 같지 않고, 물고기 같지 않으면서 물고기 같습니다.”

    -권 교수: “하하 그렇습니까.”

    △유 평론가: “그 물고기, 특허 내면 좋겠습니다.”

    -권 교수: “허, 제 그림에 등장하는 소재를 특허 내지는 않습니다.”

    △유 평론가: “아니, 왜요?”

    -권 교수: “제가 물고기를 그려온 역사가 있는데, 다들 제 물고기는 알아봅니다.”

    (2001년 9월 서울 예술의 전당서 열린 ‘권영호 회유전(回遊展)’에서 유준상 미술평론가와의 대화에서)

    서양화가이면서 가장 한국적 화가로 통칭되는 권영호(74·경남대 명예교수) 화백.

    권 화백은 유화로 그림을 그리지만 모든 주재는 한국의 토속과 서정, 서민들의 삶과 불교사상, 목어·물고기를 통한 회유사상(回遊思想)을 담고 있다.

    서양화 기법을 빌려 쓰고 있지만 권 화백은 어디까지나 한국 작가이고, 한국적 사유와 문화전통에서 우러나는 서정과 사상을 시각화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사인할 때 서양화가가 흔히 하는 영문 대신 한글로 서명한다. 다른 곳에는 고집을 잘 안 피워도 서명만큼은 한글로 하는 괴짜 같은 고집이 있다.

    노익장을 과시하며 자신만의 독특한 작품세계를 추구하고 있는 권 화백을 만나기 위해 마산시 진동면 요장리 고즈넉한 어촌마을에 자리 잡은 그의 작업실을 찾았다.

    ■ 서민의 애환에서 회유(回遊)까지

    권 화백의 그림세계는 많은 변천을 겪어 왔다. 청년기, 장년기, 노년기 등 인생의 중요 시기를 거칠 때마다 그는 그림으로 그의 경륜을 과시해 왔다.

    60년대 그의 그림 소재는 주로 서민들의 애환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그래서 어시장에서 생선을 파는 아줌마들이 입은 옷이나 한겨울 양지바른 곳에서 군고구마를 파는 노인의 두툼한 장갑 낀 손과 털모자에서 느껴오는 선과 색이 그림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는 70년대는 흙에 심취했다. 자연의 본향인 흙은 그의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가 묻힌 곳이자 언젠가 그도 갈 곳이 흙이라 생각하면서 인간 존재의 덧없음을 깨닫고 마냥 흙이 좋아 흙을 그렸다.

    수직과 수평선이 교차하는 나무 문살에 관심을 보인 시기는 80년대이다. 옛 선비들의 강직한 절개가 문살에서 배어 난다. 더욱이 그 문을 통해 밖에서 아침밥을 준비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문 틈으로 지켜보면서 침을 삼키던 그 포근한 기억들이 녹아든 것이 바로 ‘문살’ 그림들이다.

    권 화백의 90년대는 10여년간 투병 후 내세의 문턱이라고 볼 수 있는 산사의 말 없는 목어(木魚), 사불상(四不相), 문(門), 연(蓮) 등을 즐겨 그리다 여백의 여유로움과 허공의 즐거움을 발견하고 그린 그림들이 주종을 이룬다.

    정년을 맞은 2000년대는 자유를 갈망하는 그림이 대다수이다.

    정년은 그에게 40여년간 몸에 밴 교육자란 울타리를 벗어나게 한다. 정년은 그를 자연인으로 되돌려놓고, 그에게 무한한 자유와 해방감을 듬뿍 안겨주면서, 자신이 좋아하는 그림만 그리도록 해 줄 것이다.

    그때 그는 해방된 기분을 만끽하면서 여기저기 발길 닿는 대로 돌아다니기도 하고, 마음껏 그리고 싶은 그림을 그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 마음의 은유가 바로 회유(回遊)라는 그림이다.

    ■ “목어와 물고기는 나와 인간”

    2000년대부터 그가 그리는 그림에는 거의 대부분 목어(木魚)와 흰물고기가 등장한다.

    목어는 자기 몸을 희생하면서 수중 중생의 명복을 비는 상징적 물고기이다. 권 화백이 흰 물고기를 주로 그리는 것도 백의민족이라는 것을 은유적으로 표시하고 있다. 흰색은 고요한 아침빛을 받은 창호지 문의 색깔이고, 백자의 색깔, 무명옷에서 배어 나오는 색깔, 특히 가장 한국적인 빛을 추구하는 자연스런 마음에서 우러나는 빛깔이다.

    ‘회유도’에서 등장하는 긴 네모형에 가까운 흰 물고기들은 우주공간을 통해 열려 있는 바다를 통해 어디든지 갈 수 있는 자유로운 존재이다. 물고기는 생명, 존재, 삶을 말하고 순리와 윤회와도 상통한다. 일시성과 일과성의 존재에서 영원성, 회유성을 발견하고 수용하면서 마침내 깨달음을 통해 ‘대자유’를 맛보게 되는 기쁨의 역할을 한다.

    그래서 회유도는 자신의 깨달음의 빛이자 몸짓이고 텅빈 허공에 가득 찬 충만의 형상이다. 그가 그림을 통해 역설하고 있는 회유사상은 생명의 한계성을 초월한 영원의 발견이다. 소멸의 생명이 아닌 시와 공간에 영원히 존재하는 질서, 그 대자유 속에 있는 것이다.

    어쩌면 그가 대자유를 만끼하고 싶은 것은, 교직을 떠나 혼자만의 삶을 꾸려야 하는 그가 그동안 교육이라는 틀을 벗어나 물고기처럼 자유롭게 떠다니고 싶은 자신의 욕구를 노래하고 있을지 모른다. 모든 것을 떠나 예술가답게 편안한 마음으로 살아보겠다는 자신의 의지의 표현인 것이다.

    그래서 그는 “물고기는 자유를 갈망하는 나 자신을 묘사한 것이고, 그 자유를 누리려는 모든 인간을 표현한 것이다”고 설명한다.

    ■ “40 이후 인생은 덤이었지”

    그는 45세 때인 1981년 B형 간염 진단을 받았다. 젊은 시절 창작의 고통을 감내하기 위해 입에 댄 술과 담배가 원인이었다. 각혈까지 나와 가족과 주변사람들을 안타깝게 했다.

    그때 그는 이미 사선을 넘었다고 생각했고, 그 이후의 인생은 덤으로 산다고 할 만큼 ‘얼마일지 모를 덤’을 위해 치열한 창작과 삶을 살아 왔다.

    지금 그의 나이 74세. 그가 “집사람이 간호를 잘해 지금까지 살고 있다”고 할 만큼 부인 노규자(68)씨는 인생의 동반자이자, 생명을 지켜준 은인이다.

    음식을 짜게 만들지 않고, 많이 못 먹게 하고, 고기는 일절 가까이 하지 않는 등 권 화백과 가족들의 밥상은 웬만한 사찰음식 못지않을 정도로 간소하고 정갈했다.

    권 화백은 자신이 챙길 만한 전시회 오픈식은 꼭 참석하지만 그의 얼굴을 긴 시간 볼 수는 없다. 보고 싶은 얼굴들을 대하면 자신도 모르게 술잔에 손이 가고, 음식을 조절하기 힘들 정도의 정리(情理)에 이끌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아예 양해를 구하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온다.

    김해 신어산 자락에서 서각과 공예 작품을 만드는 ‘학고방’ 주인 원경 장용호씨는 “권 교수님은 마음이 너무 따뜻한 분이다. 외로운 아이들을 돕고, 자신의 작품을 사회에 기증하는 등 예술인들의 표상이 되고 있다”고 기억했다.

    장씨의 기억대로 권 화백은 경남불교미술협회 회장을 맡으면서 고성 보리수동산 아이들을 위해 큰일을 쳤다. 아이들을 위해 무엇을 도와줄까 생각했는데, 역시 그림밖에 없었다. 그는 자식 같은 그림 40여 점을 지난해 3월 보리수동산 돕기 후원기금 마련을 위한 전시회에 바쳤다.

    지난 8월에는 경남불교미술협회전 수익금을 불우이웃돕기 성금에 사용하도록 주도해 윤판기 회장 등 간부들이 성금을 전달했다. 200~50호 크기 그의 그림 101점도 경남대에 기증했다. 26년 동안 몸담아온 학교에 그의 체취를 오랫동안 남겨 놓고 싶었기 때문이다.

    권 화백은 “집사람이 허락해줘 작품 기증이 가능했다”고 말했다.

    그는 취재 말미에 우리 것, 하다못해 동양적인 것을 많이 그린 뒤 육신의 자유를 추구하겠다는 말을 했다. 하지만 아직 잘 안된다는 겸손 가득 담은 말도 던졌다. 노 화백의 얼굴에 깊게 팬 주름이 말하듯, 긴 턱수염과 백발이 대변하듯 아직도 그는 그림에 고민을 많이 하는 불면의 밤과 친숙해 보였다.

    ▲ 권영호 화백은

    1936년 경주에서 3남1녀 중 셋째로 태어나 포항수산고를 졸업한 뒤 서라벌예술대학 연극영화과에 입학했으나 곧바로 미술과로 전과해 2년 과정을 마쳤다(1961년). 10년 뒤 같은 대학 회화과를 거쳐 영남대 대학원을 졸업했다. 1961년부터 대구·경북의 중·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1976년 경남대학교 사범대학에서 교수가 된 후 2001년까지 재직했다. 경남미술대전과 부산미술대전, 울산미술대전 등 각종 공모전의 심사위원을 역임했고, 경남도문화상(1995년)을 수상했다.

    글= 조윤제기자 cho@knnews.co.kr

    사진= 성민건기자 mkseong@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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