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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향기 (27) 고영립 화승그룹 회장

“일에 파묻힌 게 나의 인생, 암 이긴 후 사랑과 배려 배웠죠”

  • 기사입력 : 2009-12-22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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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영립 화승그룹 회장이 부산 시가지를 배경으로 환하게 웃고 있다.

    평사원으로 입사해 그룹의 CEO가 된 ‘샐러리맨의 신화’, 야간에 불시에 점검을 해 직원들로부터 얻은 별명 ‘올빼미’, 회사의 부도 사태를 해결한 ‘소방수’ 등 화승그룹 고영립(59) 회장은 그 별명만큼이나 다양한 인생의 스펙트럼을 갖고 있다.

    ‘무릎팍 도사’가 된 심정으로 그의 인생을 속속들이 파헤쳐 보고자 한다.

    ◆샐러리맨의 신화

    고영립 회장이 화승그룹(옛 동양고무산업)에 입사한 것은 1976년. 고 회장이 입사할 당시 동양고무산업은 업계에서는 중견쯤 되는 회사였다. 공채 1기로 입사한 고 회장은 말 그대로 초고속 승진을 거듭해 37세에 최연소로 임원에 올랐다.

    IMF 외환위기로 그룹 내 계열사가 부도나 화의에 들어갔고, 다른 계열사 사장에 있던 고 회장에게 그룹 재건의 임무가 맡겨졌다.

    오너 일가와 학연, 지연, 혈연이라고는 없었지만, 열정을 갖고 힘든 일을 마다 않고 해내는 그를 회사가 원했다.

    “올해까지 34년째, 지금도 기억이 선명하고 감개무량합니다. 빠른 나이에 승진한 것이 뭐 대수겠습니까마는 샐러리맨으로서 정말 후회 없이 열심히 해왔다고 자부합니다. 제 젊은 날은 별 보고 출근하고 별 보고 퇴근하는 일상의 연속이었습니다.”

    “정말 열심히 일했습니다. 때로는 목숨도 아끼지 않았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살아온 경영자로서의 인생이 후배들에게 소박한 교훈이라도 주었다면 제 인생은 성공작이었다고 위안하겠습니다.”

    ◆돼지국밥집의 추억

    그의 삶을 반추하다 보면 유난히 돼지국밥집이 자주 등장한다. ‘화의’에 들어간 회사를 살리기 위해 직원들과 격의 없는 토론을 벌였던 곳도 돼지국밥집이요, 아내를 불러 사재를 털어 회사에 투자하자고 설득한 곳 역시 돼지국밥집이었다.

    “돼지국밥은 경상도 음식이죠. 다른 지역 사람들에겐 익숙하지 않은 음식이지만 우리 경상도 사람들에겐 가장 친숙한 서민의 식사입니다. 저에게 돼지국밥은 마치 고향으로 돌아간 듯한 느낌을 주는 맛이라고 할까요. 그래서 제겐 힘의 원천입니다.”

    그가 회사의 ‘소방수’로 본격적으로 그룹 재건에 나선 어느 날, 그는 아내를 부산의 한 돼지국밥집으로 불렀다.

    “회사가 어려우니 우리 집을 담보로 부족한 자금을 대면 어떻겠느냐고 넌지시 떠봤어요. 집사람은 싫은 기색 없이 ‘그렇게 하이소’라며 뜻을 따라줬습니다.”

    이후 회사 직원들과도 자주 돼지국밥집에서 만나 회사의 어려움을 털어놓고 도움과 조언을 구하곤 했다. 그에겐 희로애락을 함께한 곳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암, 시한부 선고

    2004년 왼쪽 겨드랑이 밑에서 혹이 만져졌다. 병원에 가 보니 흑색종이라는 피부암이었다. 임파선에 붙었는데 3개월 정도밖에 살지 못한다는 말을 의사에게 들었다. 국내에서 치료할 수 없어 미국으로 건너가 치료를 받아야만 했다.

    “인생의 깊은 절망감을 느꼈습니다. 암이라고 선고 받을 때 정말 참담했습니다. 이제는 생을 정리해야 할 때라고 생각하고, 묏자리도 아들들에게 가르쳐 주고 나니 아무도 없는 캄캄한 세상에 나 혼자 있는 듯한 절망감이 찾아왔습니다.”

    187cm에 90㎏이 넘는 거구인 그는 일반적인 암환자보다 3배의 항암제를 투여받아야 했고, 고통의 시간을 보냈다.

    “항암 치료는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가장 큰 육체적 고통입니다. 마음의 우울함 또한 큰 어려움입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회사가 걱정이었고, 정말 빨리 병마를 떨쳐내고 가까이 보고 싶었습니다.”

    발견 당시 3기암이었지만, 그는 항암 치료를 견뎌냈고, 불과 4개월 만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암은 제거했지만 혼자서는 서 있을 수 없을 정도로 체력이 약화돼 있었다.

    ‘아이러니’라고 할까. 회사를 위해 일하다 생긴 병이었지만, 그는 다시 회사에 나갔고 일을 하면서 건강이 회복되기 시작했다.

    “병마를 이기지 못했다면 말 그대로 ‘화승과의 추억’을 뒤로 하고 퇴장했겠지만 저는 짧은 시간 안에 그걸 이겨내고 다시 이 자리에 서 있습니다. 인생을 한 번 더 얻은 것이니 이제 과거와 또다른 혁신의 열정으로 우리 그룹을 보다 큰 회사로 만들기 위해 더 부단히 뛰고 또 뛰었습니다.”

    그가 암에 걸리기 전이지만 한국백혈병소아암협회 부산지부의 회장직을 맡아 활동했다.

    “화승그룹이 해온 사회 봉사활동이었지만, 이후에 저도 암을 앓았으니 운명적이라는 생각마저 듭니다. 기업이 어려워도 마음만 있으면 얼마든지 사회에 따뜻함을 나눌 수 있습니다. 10년 전 제가 부산지부의 회장직을 선뜻 맡게 된 것도 바로 그러한 사회적 책임과 소명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낡은 수첩 속 ‘자경문’

    그는 수첩에 3가지를 적어서 항상 간직하고 보고 스스로를 다잡는다.

    ‘욕심을 버려라’, ‘주위를 잘되게 하자’, ‘큰 일, 큰 생각, 큰 행동을 하자’.

    “암 투병 후 회사를 경영하는 방식이나 사회를 보는 눈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먼저 회사가 잘되는 것 외에 개인적인 욕심을 버리기로 했습니다. 또 내 주위의 사람들이 잘되도록 항상 상대편 입장에서 생각하는 자세를 가지게 됐습니다. 그래서 암 투병 후에는 웬만하면 회사 직원을 한 명도 안 내보내려고 노력했습니다.”

    큰 일, 큰 생각, 큰 행동을 하자고 마음먹고부터는 누구의 잘못을 탓하기 전에 스스로를 돌아보게 됐다고 한다.

    “예전에는 협력회사가 잘 안되거나, 부도나면 서로 잘못을 탓하기 바빴지만, 요즘은 ‘그 회사가 그동안 우리 회사에 벌어준 돈이 얼마인데’ 하는 생각이 먼저 듭니다. 그래서 잘못은 나중에 따지고 빨리 수습을 잘하라고 지시합니다.”

    수첩 속 그 자신만의 ‘자경문’은 인간관계를 어떻게 가져가는가를 고민할 때마다 답을 준다고 한다.

    “경영인은 비록 아랫사람이라도 상대편 생각이 맞으면 받아들이는 열린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인간관계가 형성되지 않으면 회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수없이 체험했습니다. 그래서 평소 현장을 많이 다니고, 직원들과 진솔한 대화를 많이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경영자는 현장에서 살아야 한다

    화승그룹은 르까프, 케이스위스, 아디다스, 머렐 등 스포츠 브랜드로 대변되는 기존 사업군 외에도 현대·기아차는 물론 도요타와 GM 폭스바겐, 포드 등 세계 완성차업체에 부품을 공급하는 화승R&A, 정밀화학 분야의 화승인더스트리 등 계열사로 구성돼 있다. 올해 연 매출이 3조원에 육박한다.

    체질 개선을 통해 현재의 화승을 일구어낸 고 회장의 경영 철학은 간단했다.

    “‘경영자는 현장에서 살아야 한다’ 이 한마디면 되겠습니까. 저는 평생을 화승그룹에서 근무해 오면서 현장을 떠나본 적이 없습니다. 기업 운영에서 가장 중용한 것은 신뢰인데 고객과의 신뢰도 있고, 종업원들과 경영자와의 신뢰도 있습니다. 이러한 신뢰가 올바르게 형성되려면 ‘열린 자세’를 가져야 하고 그러려면 현장의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그는 계열사를 챙기는 것은 물론이고 1년에 100일이 넘는 시간을 해외지사에서 보낸다. 항공사 마일리지가 100만을 넘어설 정도이다.

    “기업인은 현장을 보지 않으면 현장감과 판단력이 떨어집니다. 현지에서 바이어를 만나고 책임자들을 만나고, 전문가들을 만나다 보면 정확한 경영적 판단을 내릴 수 있지요. 경영 환경 변화가 초스피드인 요즘 현장 경영은 더욱더 요구되고 있고 가장 소중한 경영 덕목입니다.”

    ◆훌륭한 할아버지가 되고 싶다

    외부 강연을 잘 나서지 않는 고 회장이 최근 ‘남강100인포럼’에서 특강을 했다. 그는 강연 말미에 ‘훌륭한 할아버지가 되도록 노력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제가 사랑하는 큰아들이 지금 미국에서 살고 있습니다. 손녀와 손자를 보게 됐는데 ‘정말 손주가 예쁘다’는 감정을 실감하고 있습니다. 가끔 보는 손주들이지만 현재 저에게는 가장 소중한 가족입니다. 이 두 손주들이 ‘할아버지’라고 부를 때 세상 모든 시름이 사라집니다.”

    보통 나이가 들면 안락한 노후를 꿈꾼다지만 고 회장은 손자들을 보면서 남은 인생을 더 열심히, 더 열정적으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가졌다고 한다.

    “이 아이들이 제게는 희망과 꿈을 주는 보배입니다. 이 아이들로 인해 저는 더 긍정적으로 삶을 사랑하게 되었고, 화승에 첫발을 내디뎠던 신입사원일 때보다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만큼 저는 제 삶을 더욱더 사랑하는 의무감마저 갖게 되었습니다.”

    ☞고영립 회장 프로필= 1950년 진주 진양 출생, 1975년 고려대학교 법대 졸업, 1976년 동양고무산업(주) 입사, 1990년 동양고무산업 상무이사, 1997년 동양고무산업 부사장, 1998년 (주)화승 T&C 대표이사, 1999년 (주)화승, (주)화승상사 대표이사, 2002년 화승그룹 총괄부회장, 2007년 화승그룹 회장

    글=차상호기자 cha83@knnews.co.kr

    사진=전강용기자 jky@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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