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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향기 (28) 조현순 한국여성CEO센터 관장

“여성과 아이들 일이라면 어디든 달려갑니다”

  • 기사입력 : 2009-12-29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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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난 22일 저녁 창원 북면 경남범숙학교에서 조현순 관장과 여학생들이 크리스마스 트리를 만들며 즐거워하고 있다.

    조현순 한국여성CEO센터 관장을 처음 만난 건 지난 8월 경남범숙학교 아이들의 여덟 번째‘아름다운 도전’ 발대식에서였다.

    아이들이 걷게 될 지리산 둘레길 사전 답사를 하다 다리를 다쳐 휠체어 신세를 지고 있었다.

    포근함보다는 카리스마를 풍겼던 여성 지도자를 크리스마스를 일주일 앞둔 18일 오후 창원 북면 경남범숙학교에서 다시 만났다.

    마주 앉은 그는 바쁜 강의 일정을 소화해 내느라 매우 분주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고 근황을 전했다.

    “어제까지 쉴 새 없이 움직였는데 오늘 아침에는 정말 일어나기가 힘들었어요. 그래도 하는 게 마음이 편하죠. 여성 관련 일로 나를 부르면 조건 없이 간다는 신념과 원칙이 있으니까요.”

    늘 바쁘게 살지만 요즘 특히 바쁜 이유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했다.

    지난해 이곳 경남범숙학교와 창원 여성의 집을 떠나 본격적으로 시작한 새로운 일에 대한 것이었다.

    경남 여성계의 거목이자 구심점인 조현순(58) 관장은 경남 여성계의 인적 인프라와 시스템, 끈끈한 조직력 등을 초석부터 다져 지금의 수준까지 끌어올렸다. 그동안 가정폭력, 여성인권, 청소년 보호, 성매매와 성폭력 방지, 성인지 문제 등 각종 여성문제 개선에 앞장섰던 그는 앞으로 여성 지도자들을 전문 경영인으로 훈련시키는 일에 매진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조 관장이 발로 뛰어다녔던 시간만큼 경남을 비롯한 우리나라 여성인권은 발전했다.

    여성문제를 해결하고 개선하는 시스템도 자리를 잡았다. 이 시점에서 그가 눈을 돌린 것은 바로 ‘여성지도자 양성’이다. 그는 지난해 하동으로 거처를 옮기고 ‘한국여성CEO센터’를 세웠다.

    2001년 여성부가 생긴 후 지난 10년간 전국에는 여성 단체장, 기관장들이 2000명 정도 탄생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수요로 제대로 된 훈련 없이 그 자리에 오른 여성들은 능력 발휘를 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뿐만 아니라 그로 인해 도움이 필요한 여성과 청소년들의 손해가 불가피할 수도 있다.

    조 관장은 여성 문제를 진두지휘할 여성 톱 지도자를 키워내는 것이 시급하다고 판단했고 곧장 실행에 옮겼다. 그는 여성 지도자들을 전문 경영인으로 훈련시키기 위한 매뉴얼 ‘CEO프로젝트’를 만들었다. 프랑스, 영국 등에서 잠시 공부했던 그는 유럽에서 개발된 감마모델(총체적 경영모델)을 도입해 국내에 첫 감마연구소를 만들어 20여년간 여성을 교육시켜 왔다.

    “우리나라의 여성 인권에 관한 법은 꽤나 수준이 높아요. 하지만 법 집행자는 남성인 경우가 많아요. 법을 제대로 이해하고 집행하는 사람이 없다면 그건 죽은 법이에요.”

    그는 여성 관련 법을 이해하고 적절하게 집행할 여성 리더를 키워내야 하는 필요성을 주장했다. 전국적으로 여성 지도자 수는 적고 양성 체계 역시 열악한 상황이다. 이것이 그가 도내를 비롯해 강원도, 인천, 대전, 대구 등 전국을 누비는 이유다.

    “내가 여성 관련 일을 시작할 때에는 법과 제도 등이 전혀 만들어지지 않은 상태였지만 지난 10년간 시스템이 구축됐고 어느 정도 궤도에 올랐습니다. 실무 처리 능력을 갖춘 여성은 많이 있지만 전체적 그림을 그리고 이끌고 갈 선장 역할을 하는 여성 지도자를 양성하는 사람은 여전히 부족한 실정이죠. 이것이 내가 남은 일생 동안 할 일인 것 같아요.”

    여성운동, 노동운동, 환경운동…. 각종 운동의 중심에 서 있었던 조현순 관장이다. 무엇이 그를 움직이게 했을까.

    취미조차 일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조 관장에게 여성 운동을 시작한 계기에 대해 묻자, 망설임 없이 ‘타고난 것 같다’고 했다. 여성인 자신이 ‘유관순 언니’(원래 답은 유관순 누나)라고 쓴 답이 틀렸다고 처리된 것에 불복해 선생님께 이의를 제기한 초등학생, 누명을 쓴 친구를 대신해 선생님의 사과를 받아낸 여고생이 조현순 그였다. 정의롭지 않은 것을 보면 마음이, 몸이 가만 있지 않았다. 하지만 정의를 앞세워 약자를 보호하려고 했던 자신의 행동을 정작 약자가 반가워하지 않는다는 것에 충격을 받고, 진정한 인권보호를 위해 일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뒤에는 신앙의 힘이 있었다. 그는 독실한 가톨릭신자이며 성소자의 길을 걷고 있다. 그가 신앙과 만난 것은 성지여자중학교로 진학하면서였다. 집안 문제로 중학교 등록을 제때 하지 못해 좌절과 낙담을 겪은 후 예상치 못했던 성지여중에 입학했고 운명처럼 ‘하느님’을 알게 됐다. 그의 여중시절 기억의 페이지에는 소녀의 가슴을 가득 채운 하느님과 어린 여중생의 눈에 너무 예뻐 보였던 수녀 영어선생님, 가슴을 따뜻하게 데워 준 친구들, 새벽 기도, 아침 일찍부터 밤 늦게까지 도서관에서 보냈던 시간들이 있었다.

    “그때 학교 도서관에 있는 책은 장르 구별 없이 거의 다 읽었는데 그 시간이 나를 매우 풍부하게 만든 것 같아요. 세상을 더욱 논리적으로 보게 됐을 뿐 아니라 진정한 사람의 가치를 알게 된 시간이기도 해요.”

    사람은 성적, 금전, 능력 등을 다 떠나 그냥 사람 그 자체로 유익하다며 범숙학교의 운영 원칙에 대해 얘기했다.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는 것, 한순간이라도 조건 없이 사랑받았다는 것, 인간으로서 존엄하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 바로 범숙학교의 철학이다.

    “저를 비롯한 선생님들은 어떤 아이든 결코 포기를 모릅니다. 아이들의 외모나 성적이 조금 나아지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그 아이들이 아무런 조건 없이 온전히 사랑받았다는 것을 마음속에 심어주는 것이 중요하죠.”

    올해 경남 여성상을 수상하기도 한 그는 1991년 마산 가톨릭여성회관에서 경남 최초의 여성쉼터를 만든 주인공으로 상처받은 여성들과 청소년들의 엄마를 자청했다. 쉼터를 확장시켜 창원 여성의 집을 만들었고 경남 범숙학교도 지어졌다.

    범숙학교의 설립 이유는 한 아이의 미래 때문이었다.

    여중생 한 명이 한밤중에 조 관장의 집으로 찾아왔다. 가정폭력으로 엄마를 잃고 가족에게 상처받은 후 버림 받은 아이였다. 아이는 길거리에서 혼자 끼니를 이어가다 위기상황에 내몰렸고 경찰에 잡혀 조 관장에게 인도된 것이었다. 잔뜩 화가 나 금방이라도 할퀼 듯한 기세의 고양이 같던 아이는 강한 저항 의사를 표현하며 누그러들 줄 몰랐다.

    “처음에는 감당이 안 될 것 같았어요. 순간 기지를 발휘해 카메라로 아이의 얼굴을 찍었죠. 셔터를 누르면서 속으로 한 달 뒤에 네가 어떻게 변할지 보자고 생각했어요.”

    마음 속으로 지혜를 구하면서 아이에게 한 발씩 다가가던 찰나 당장 물어뜯을 기세로 저항하던 아이와 조 관장의 시선이 딱 마주쳤다.

    “그 아이하고 눈이 딱 마주쳤는데 가슴 저 아래서 저릿한 아픔이 올라오더군요. 아무 말도 않고 뚜벅뚜벅 다가가 아이를 퍽! 하고 안았어요. 처음엔 놀라 저항하더니 곧 가슴 안으로 폭 안겨 오더라고요. 고마웠어요. 무사히 내 품으로 와 줬다는 게…. 그리고 내가 어른이라는 사실 자체로 그렇게 미안했습니다.”

    그렇게 그와 함께 하게 된 이 아이는 좀처럼 학교에 적응하지 못했다. 외국에서 다양한 단계의 대안학교 사례를 봤던 조 관장은 이 아이를 위한 학교를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했다. 도교육청, 교육부를 찾아가 결국 위탁교육제도를 만들어냈다. 위탁교육제로 범숙학교에서 생활했던 그 아이는 중·고등 과정을 마치고 대학에 진학해 어엿한 사회복지사가 됐다.

    “아이들이 여기 와서 나를 보고 ‘여자도 이렇게 당당할 수 있어요?’하고 물어요. 이 아이들에게 내가 역할 모델이 되어 줘야죠. 이 아이들을 잘 이끄는 것이 여성 지도자들이 할 일이에요. 모든 여성들이 스스로에 대한 비전을 만들고 그로 인해 느끼는 행복이 향기처럼 퍼져 나가는 것이 중요해요.”

    늘 아이들과 여성들의 상처와 행복을 걱정하는 조 관장에게 본인을 치유하는 방법을 물었다.

    “힘들고 외롭지는 않아요. 가끔 사람들이 내 말을 잘못 알아들을 때 고독함은 느끼지만요. 나는 신앙인이고, 사람들 안에 있을 때 살아 있음을 느껴요.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이에요. 여성과 아이들을 돕기 위해 내 힘이 필요하다면 어디든 조건 없이 갈 겁니다.”

    ☞조현순 관장은 1951년 마산에서 태어났으며 마산가톨릭여성회관 관장, 가출소녀 쉼자리 전국협의회 창립위원 및 초대회장, 마창환경운동연합공동의장, 창원여성의집 관장, 2008 경남세계여성인권대회 집행위원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한국여성CEO센터 관장을 맡고 있다.

    글= 김희진기자 likesky7@knnews.co.kr

    사진= 성민건기자 mkseong@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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