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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향기 (29) 전강석 경남통일농업협력회 회장

“통일은 거창한 이념이 아닌 작은 실천으로 이루는 것”

  • 기사입력 : 2010-01-12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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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강석 경남통일농업협력회 회장이 자신이 운영하는 밀양 상동면의 육묘장에서 고추 모종을 살펴보고 있다.

    “산 자여 따르라”고 외치던 사회 변혁가는 때가 되면 한자리씩 꿰찼고, 어느 순간 따라가던 사람들만 지향점도 없이 물끄러미 서 있는 경우를 지난 세월 동안 많이 목도했다. 그는 맹목적으로 따르지도 않았고, 나를 따르라고 외치지도 않았다.

    동장군이 맹위를 떨치던 지난 연말, 강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트럭에 폐품을 한가득 싣고 나타났다. 그의 삶이 그러하듯 무엇 하나라도 몸을 움직이지 않고서는 이루어지는 것이 없다는 평소의 소신을 이렇게 실천하고 있었다.

    ‘농사꾼이 통일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 있겠는가.’ 세간에 있을 법한 이러한 질문은 그를 만나고 나면 잘못된 믿음이었구나 하고 금방 깨닫는다.

    평생 단 한번 가기도 어려운 북한을, 제집 드나들 듯 2006년부터 4년간 무려 55차례나 방문했다.

    조용한 목소리, 고운 얼굴, 어느 하나 농사꾼으로 보이질 않는 (사)경남통일농업협력회(이하 경통협) 전강석(48) 회장을 만났다.

    ▲대학 졸업 대신 농촌으로

    대학 81학번. 데모로 날이 밝고 데모로 날이 새던 시절이다. 시대 상황은 전 회장을 민주화 운동으로 내몰았고, 진주지역 농민회와 함께 학생운동을 한 것이 농사꾼이 되겠다는 결심을 한 계기가 됐다.

    졸업을 1년 앞둔 대학 4학년 때, 농사라고는 부모 일을 거들던 것이 전부였지만 전 회장은 진정한 인생의 가치를 농업을 통해 실현하려 했다. 농촌으로 들어갔다. 대학 졸업장을 포기하기란 그리 쉽지만은 않았다.

    ‘인생을 돌아보며 후회하지 않을까’를 두고 고심했다.

    “후회하지 않기로 결심하자.”

    땅도 돈도 없이 맨몸으로, 진주 인근에서 겨울 고추와 오이 등 7년간 농사를 짓다 보니 진짜 농사꾼이 돼 있었다.

    지금 정착해 있는 밀양 상동면에는 1995년에 옮겨 왔다. 물론 연고도 없었다.

    여기서 시작한 일은 육묘농이었다. 당시는 오이 수박 고추 등의 모든 농사 공정을 직접 농가에서 수행했다.

    시설하우스의 분업 방식은 농가에 많은 변화를 불러왔고, 상당히 성공했다. 2000년과 2001년에는 토마토 오이 가지 수박 등의 모종을 일본으로 수출까지 했다. 육묘하우스는 당시 1개 동에서 지금 10개 동 1만8000㎡(5500평)으로 늘었고, 영농기에는 60여 명이 일을 하는 준기업농으로 발전했다.

    전 회장의 성공 소식에 육묘를 하려는 사람들이 밀양으로 한두 명씩 찾아왔다.

    지금은 11가구에 기업농까지 가세해 육묘를 하고 있다. 전 회장은 이들에게 많은 도움을 줬고, 이들을 중심으로 ‘경남통일농업협력회’를 결성하는 계기가 됐다.

    ▲북한에 간 까닭은

    전 회장의 학생운동은 이념적으로 멀었다. PD(민중민주)니, NL(민족해방)이니 하는 계보와도 상관없었다.

    한국사회가 급격히 산업화하는 과정에서 소외됐던 농업의 현실에 눈길을 돌렸고, 더 이상 방치하면 안 된다는 생각에 농촌으로 달려간 것뿐이다.

    북한의 식량난 뉴스를 접하고 나의 농업기술을 이용해 북한 식량난을 덜 수 있게 한다면 좋지 않을까 생각했다. 햇볕정책이 한창이던 2005년, 함께 육묘를 하는 사람들과 의미 있는 사업을 한번 해보자고 덤벼든 것이 대북 농업지원사업이다.

    이들이 경남통일농업협력회를 결성한 것은 정치적 목적이나 이름을 내기 위해서도 아니고, 이득을 얻기 위해서는 더욱 아니다.

    “남한의 선진화된 농업 기술을 북한에 전수시켜 한겨레가 함께 잘살자고 하는 것이 전부였죠.”

    전강석 회장이 밀양 상남면 통일딸기촌에 걸린 평양 장교리 협동농장 대형 사진 앞에서 웃고 있다.

    ▲너무 몰랐던 북한 사정

    북한의 농업 사정은 열악했다.

    “전기도 없었고, 수송수단도 없었죠. 비료에 매달리는 원인도 축산이 없으니 퇴비도 될 리 없었고 농약도 있을 리 만무했습니다.”

    관개수로도 없었고, 경운기 하나 없었다. 모든 것을 맨손으로 해결하다 보니 농업생산성이 높을 수가 없었다. 전 회장은 농업생산성을 높이는 것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필요한 농자재는 회원들이 모금해 남한에서 북한으로 보내면서 북한의 농사를 바꾸기로 했다.

    이때 경남도가 예산 10억원을 편성, 대북한 농업 지원에 나섰다. 천군만마를 얻은 전 회장은 평양시 강남군 장교리에서 어린모를 기계로 이앙하는 새로운 농법을 북한에 전수하기 시작했다.

    전 회장은 북한의 실상을 얘기하는 데는 주저했다.

    “북한 주민에 대해 왜곡된 시선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군데군데서 북한의 어려움을 절절히 느낄 수 있었다. 신농법을 장교리 협동농장에 전수하기 위해 방문했을 때가 2월이었다. 살을 에는 듯한 추위에 안내 받은 사무실 방은 냉골이었다. 손님이라고 아랫목을 권해 앉았는데도 아랫목이나 윗목이나 진배없었다.

    평양 호텔에 묵다 예고 없이 불쑥 찾아갔더니 주민들이 난감해 했다. 왜일까 하는 의문은 금방 풀렸다. 반찬으로 나온 것은 콩자반과 마늘종(속대) 몇 개밖에 없었다. 북한 주민들은 그렇게 먹고살고 있었다.

    주민들은 중국산보다 한국산 기계가 더 좋은 줄도 안다. 국산 이앙기가 좀 늦어져 중국산으로 보내겠다고 했더니, “늦어도 좋다. 한국산으로 보내달라”고 했다.

    당초 비닐하우스 10동 분의 자재를 보냈는데 실제 비닐하우스는 15동이 됐다. 자투리 자재를 하나도 버리지 않고 하우스를 더 지은 것이다.

    ▲달라진 장교리 협동농장

    처음 비닐하우스에서 어린모를 심어 이앙기로 논에 벼를 내는 농법을 제안하자 북한은 난색을 표했다. 처음 40만평을 대상으로 하자고 제안했지만 북한에서는 절반으로 하자고 수정 제의를 했다. 북한 당국자는 비장하게 말했다. “만약 실패하면 우리 주민들은 다 굶습니다.”

    전 회장은 만약 실패하면 사비를 털어 중국산 쌀을 보내주겠다고 약속했다. 이렇게 시작한 벼농사는 대성공이었고, 이듬해 이 당국자는 장교리 농장 100만평을 모두 신농법으로 하자고 제안했다. 일꾼들도 신농업기술을 배워야 한다며 20대 젊은이들로 구성했는데, 열성적으로 농사일을 배웠다.

    비닐하우스에서는 어린모를 생산하기 전에 토마토 고추 오이 등 채소를 재배해 평양 농산물 사장에 내다 파는데 장교리 채소가 다 팔려야 다른 곳 채소가 팔릴 정도로 인기가 좋다.

    “최근에는 평양 호텔 등과 계약 재배를 하고 있다”고 전 회장은 전했다.

    “장교리는 3년 연속 벼 증수 1등을 차지했고, 이 협동농장에는 더 이상 굶는 주민들이 없다”고 했다.

    ▲계속되는 통일 사업

    전 회장과 경남도는 장교리 협동농장에서의 벼 신농업에 그치지 않고 사업을 확대했다.

    장교리 소학교를 건립했고, 최근에는 장교리 소학교 학생들에게 먹일 콩우유 공장을 건립 중이다. 소학교 건립 때는 도민들의 성금으로 10억원을 쉽게 모금했는데, 꽁꽁 얼어붙은 남북 관계 때문에 콩우유 공장 건립비는 5억원을 모금하는 데도 어려움을 겪었다. 결국 4억원만 모금돼 1억2000만원은 전 회장과 이사들이 갹출했다.

    최근 콩우유 공장 건립을 위한 기자재를 북한에 보냈고, 거창군의 도움으로 삼석 국영농장에 사과단지를 조성했다.

    콩우유 공장의 원활한 운영을 위해 1인당 1000원을 기부하는 ‘1000원의 행복’ 사업을 벌여 회원을 확대하고 있다.

    네 손가락 피아니스트 이희아씨가 CD 판매금의 일부를 콩우유공장 건립 사업에 보태고 있으며, 많은 단체에서 자발적 참여가 잇따르고 있다.

    경통협은 최근 콩우유 공장 운영을 위해 폐품을 모으고 있다. 폐품이 있다는 연락이 오면 만사 제쳐두고 한걸음에 달려갈 정도로 열성이다.

    ▲통일은 말로 되는 것이 아니다

    전 회장은 “통일은 이념이나 말로 이뤄지지 않는다”고 했다.

    북한 핵실험으로 남북 관계가 악화일로를 걷고 있을 때 “이제 가면 오기 어려울지도 모르겠다”며 장교리 주민들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밥을 해주던 주민이 “많이 받았는데 나는 줄 것이 없다”며 자두만한 사과 한 개를 건넸다.

    “남북 주민 사이에 사과 하나를 건네는 따뜻한 마음이 살아 있는 한 통일은 될 것으로 믿는다”고 전 회장은 말한다.

    전 회장은 또 경남도의 고마움을 결코 잊지 못한다. “경남도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이러한 일은 사실상 어려웠다”고 말한다.

    전 회장에게 대북 사업의 상징이기도 한 밀양 통일딸기촌에서 사진을 찍자고 했다. 그러나 전 회장은 끝내 거절했다. 경남도의 사업이지 자신의 사업이 아니라는 점 때문이다. 남의 공을 자신 것으로 돌리기 싫어하는 것에서 그의 순수한 열정을 가늠할 수 있다.

    “통일은 이 시대에 꼭 해결해야 할 과제다”고 말하는 전 회장은 “진정성과 헌신한다는 정신이 있으면 시기와 방법에 문제는 있을지언정 통일은 반드시 이뤄진다”고 힘주어 말했다.

    글= 김용대기자 jiji@knnews.co.kr

    사진= 김승권기자 skkim@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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