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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6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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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작품을 말한다 (14) 무용인 정양자

“넘실대는 파도·물고기… 마산의 모든 것이 내 춤의 소재”

  • 기사입력 : 2010-01-29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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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양자씨가 마산 어시장에 위치한 무용 연습실에서 아리랑 선율에 맞춰 춤을 추고 있다.



    그녀는 화려했다. 단정하게 정리된 머리와 큰 이목구비를 강조한 화장, 연습을 위해 차려 입은 수줍은 연분홍색 바람치마는 예순이 훌쩍 넘은 나이를 무색하게 했다. 외모도 그렇지만 그의 이력과 공연 경력 등을 봐도 그 생각은 마찬가지다.

    도내 무용계의 대표적인 원로인 록파 무용단장 정양자(65)씨.

    무대 위에서 마치 공작새 같은 화려함을 선보이는 그는 스스로 ‘마산 토박이, 향토 무용가’로 불리고 싶다고 말했다.

    “고향에 내려와 후배들을 키우고 이렇게 예술혼을 불태울 수 있는 것이 얼마나 감사하고 행복한 일인지 모르겠어요. 학교 졸업하고 서울에서 활동하라고 붙잡는 사람도 많았지만 고향에 내려와 더 큰 보람과 자부심을 느꼈어요. 나는 마산 토박이고 어떤 것보다 향토 무용가로 불리고 싶은 욕심이 있어요.”

    아직도 무대에 오르는 열정을 자랑하는 그는 직접 몸을 움직여 같은 동작을 다르게 표현해내는 것이 정양자 방식의 노력이자, 자신만의 색채라고 말한다.

    “한국 무용은 춤을 추면 출수록 기가 나와요. 몸을 움직이면 한 개의 동작이 열 개가 되지요. 춤사위가 다양해지고 풍성해지면서 아름다워집니다. 그 움직임이 관객을 매혹시키죠. 이게 바로 내 방식입니다.”

    반세기, 일생을 춤에 바친 원로 무용인의 인생이 아리랑 가락을 타고 풀려 나왔다.

    △무용계 입문

    성지여중 1학년에 다닐 때쯤이었다. ‘춤’을 배우기는커녕 ‘춤’이라는 것을 제대로 알지 못했을 때였다. 친구들을 집으로 데려와 놀이를 했다. 천을 걸어 무대를 만들어 놓고 친구들에게 동작을 가르치면서 공연 아닌 공연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것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던 아버지가 어느 날 아무 말도 없이 정씨의 손을 잡고 어디론가 같이 가자고 했다.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간 곳은 바로 마산에 있던 故 김해랑 선생의 집이었다. 아버지와 김해랑 선생 앞에서 춤을 선보였다. 다듬어지지 않은 여중생의 몸짓을 지켜 본 김해랑 선생이 ‘너는 내 제자가 되겠구나’라고 한 말씀을 했다. 그때부터 김해랑선생의 제자가 됐다. 그 한마디가 지금까지 정씨를 춤추게 만든 것이다. 그렇게 춤에 입문한 그는 성지여고를 거쳐 숙명여대 무용학과에 진학했다.

    △“마산 촌년, 출세했네”

    화려한 그도 어울리지 않은 별명을 가졌을 때가 있었다. 숙명여대 무용학과 졸업 후 그는 1969년 국립무용단 1기생으로 입단했다. 국립무용단의 위세는 올림픽 기수로 나설 만큼 대단했다. 국립무용단에서 마산 출신은 정양자 혼자였다. 사투리도 이유였지만 억척스러움에 그는 일명 ‘마산 촌년’으로 불렸다. 뒤지기 싫었다. 방법은 연습뿐이었다. 밤낮을 잊고 춤추고 또 춤췄다.

    “서울 깍쟁이들 사이에서 내가 뒤지면 안 되잖아요. 지각 한 번을 안 했어요. 1등도 놓치지 않았지요. 성실함 덕분에 1972년도에 뮌헨 올림픽에 기수로 뽑힐 수 있었던 거죠.”

    노력에 대한 보상은 돌아왔다. 제20회 뮌헨 올림픽을 맞아 국립무용단원 35명이 4개월간 24개국을 돌며 우리나라를 알리기 위해 나섰다. 그 선두에 정양자가 섰던 것이다. 기수로 뽑혔을 때 동료들은 ‘마산 촌년 출세했다’고 했지만 그 벅찬 감동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1973년 국민훈장 목련장을 받았다. 그후 활동을 놓고 고민하던 중 결혼을 하게 됐고, 1974년 마산행을 결심했다.

    △고향으로 돌아오다

    마산에 돌아오자마자 무용연구실 겸 무용학원을 열었다.

    “서울을 떠나는 것을 말리는 사람도 많았지만 그때는 뭔가 나를 끌기라도 하는 것처럼 마산에 와야겠더라고요. 지금 생각해 보면 지역을 위해서 춤추고 김해랑 선생님을 위해 일하라는 계시 같은 것이 아니었나 싶어요.”

    무용학원이 서서히 자리를 잡기 시작하면서 1976년 마산 강남극장에서 귀향 후 첫 발표회를 열었다. 작품명은 ‘무녀도’였다. 무용계를 위한 행보도 시작됐다. 1983년 경남도립무용단이 만들어졌고 초대 단장을 맡았다. 도립무용단을 최고의 무용단으로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3년 동안 도내는 물론 전국을 뛰어다니며 무용단을 이끌었다. 하지만 모든 것이 마음처럼 되지 않는 법. 안타깝게도 도립무용단이 창원시립무용단으로 변경되면서 그는 단장직에서 물러났다.

    “정말 열심히 해보고 싶었는데 이때 내 예술혼이 처참히 꺾였어요. 가슴이 아파서 못 하겠더라고요.”

    낙담해 있을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스스로 무용단을 만들었다. 그것이 1991년 창단한 ‘록파무용단’이다. ‘푸를 綠, 파도 波’자를 딴 록파무용단은 잠시도 쉼 없이 움직이는 합포만의 푸른 파도를 의미하는 것이다. 올해로 19년째 정기공연을 이어오고 있다.

    이 밖에도 그는 한국무용협회 경남지회를 12년 동안 맡아 운영하기도 했다.

    △정양자의 ‘춤’

    정씨는 지금까지 약 80여 편의 무용 공연을 창작했다. 그가 스스로의 대표작이라고 꼽는 것은 마산을 배경으로 한 ‘가고파 만선’과 스승인 김해랑 선생의 유작 아리랑을 재구성한 ‘아리랑’, ‘영남류 우리춤자태’ 등이다.

    고향 마산은 그에게 많은 영감을 주는 더없이 좋은 소재이다. 그는 넘실대는 파도와 그 속에서 뛰어노는 물고기들, 어시장의 풍경 모두가 가고파 만선에 녹아 있다고 설명했다. 그래서 마산 중요행사에서 주로 초청되기도 한다.

    어떻게 작품을 만드냐고 물으니 아리랑 변주곡을 틀고 곧장 선율에 따라 사뿐사뿐 동작을 선보였다. 음악을 선택하고, 한 음, 한 음이 완전히 이해가 될 때까지 익힌 후 동작을 구상한다. 이때 동작은 선율과 어우러져야 하는 것은 당연하고 처음과 끝이 이어져야 한다고 설명했다.

    “춤은 음악, 몸, 춤동작이 하나가 되어야 하는 거예요. 그러기 위해 가능한 한 많은 연습을 통해 다양한 동작을 만들어야 해요. 몸을 움직여 춤에 새로움을 더하는 것은 예술인의 자세이고 관객에 대한 예의입니다.”

    그는 요즘도 매일 4시간씩은 춤을 춘다. 눈에 보이는 무용의 화려함이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가족

    그가 무용계에서 자신의 꿈을 펼칠 수 있었던 것은 가족의 힘이 컸다.

    든든한 지원자였던 아버지는 당신이 직접 딸을 무용계에 입문시켜 놓고서도 딸의 행보에 이런저런 말씀이 없으셨다. 하지만 뜨거운 부정(父情)이 담긴 잊지 못할 일화가 있다. 뮌헨올림픽에서 돌아와 집에 내려오니 아버지는 방안 벽면에 정양자가 기수로 순방했던 24개 나라에다 색칠을 해 표시한 세계 지도를 붙여 두셨다.

    또 시간이 날 때마다 무용학원을 찾아 딸이 학생들을 가르치는 모습을 한참 바라보다가 돌아가시곤 했는데, 마산에서 첫 공연을 가진 후 ‘집안에 무용가가 났다’며 매우 흐뭇해 하셨다고 한다. 무용 활동에 있어 한 번도 간섭이 없었다는 남편의 외조에도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고.

    △여생의 숙제, 스승 김해랑

    지난해 10월 제6회 김해랑 선생 추모 공연과 추모사업 중 하나인 ‘명무전’이 열렸다. 김해랑은 마산 출신으로 1953년 무용협회의 전신인 한국무용예술인협회를 창설해 초대 이사장을 지냈고 한국 무용계의 기틀을 잡은 무용계의 선각자로 불린다.

    정씨는 장기적으로 김해랑 선생을 추모함과 동시에 전국 무용계 자료를 집약한 무용 기념관을 짓는 것을 계획하고 있다. 그 일환으로 지난해 12월에는 이주영 국회의원의 도움으로 김해랑 선생 작품 아리랑 계승을 위한 연수회를 열었다.

    “내가 마산으로 내려온 것도 결국 김해랑 선생님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일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나 생각해요. 각 나라에는 국민 누구나 출 수 있는 민속춤이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아리랑’이 그 역할을 할 수 있게 만들고 싶어요.”

    마지막 바람을 물었다. 생각보다 소박했다.

    “나는 내가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 줄 잘 압니다. 욕심일지 모르겠지만 마지막까지 사람들에게 기억되는 무용인이고 싶고, 힘이 닿는 데까지 사람들에게 춤을 가르치고 싶어요.”

    공연 후 밀려든다는 외로움을 느낄 사이도 없이 그는 내일도 ‘춤추는 정양자’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는 곳으로 달려갈 것이다.

    글=김희진기자 likesky7@knnews.co.kr

    사진= 성민건기자 mkseong@knnews.co.kr

    ☞정양자씨는= 1945년 마산에서 출생해 숙명여대 무용학과를 졸업했으며 국립무용단 1기로 활동했다. 1983~1987년 경남도립무용단 단장, 1987~1999년 한국무용협회 경남지회장을 맡았다. 현재 한국무용협회 경남지회 고문 겸 마산지부장, 우리춤협회 부이사장 및 경남지회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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