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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고] 3·1운동 발상지를 기념한다- 추경화(충효예 실천운동본부 진주지회장 독도사랑운동본부 대표)

  • 기사입력 : 2010-03-23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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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도사랑운동본부와 충효예 실천운동본부 진주지회 그리고 뜻있는 시민 20여 명의 성금으로 지난 3월 9일 진주와 서부경남 3·1운동 발상지 기념비를 세웠다.

    진주와 서부경남 3·1운동은 서울의 고종황제 인산에 다녀 온 김재화, 박진환, 심두섭, 박대업, 강달영, 정용길 선생 등이 서울의 만세시위를 목도하고 감화감동을 받아 독립선언서와 격문을 발목 대님 속에 감추고 귀향했다. 진주시내에서 상당히 떨어진 조용한 농촌인 집현면 하촌리 김재화 자택에서 모의를 시작하게 된다.

    진주시내에는 도경, 도청, 시경이 있어 엄중하게 경계하기 때문에 조용한 시골을 선택한 것이다.

    3월 18일 화요일 12시경 다섯 장소에서 동시에 만세시위를 전개함으로써 투쟁의 효과를 거두기로 하고 각자 맡은 분야를 정하고 독립선언서의 인쇄, 배포, 태극기를 제작하는 일, 각 사회단체와 교섭하는 일 등을 분담했다.

    교회 종소리가 울리면 다섯 장소에서 동시에 시위하기로 약속한 그대로 진행되었고 법원 앞, 중안국민학교 앞, 촉석공원, 중앙시장, 대안동에서 각기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교유문을 낭독했고 태극기를 군중에 배포하고 장대의 태극기가 선두에서 이끌었다.

    김재화 선생은 3·1운동 지도자 중 지도자이며 그 당시 28세로 3살의 아들이 있었으나 오직 민족, 광복만을 생각한 애국애족심이 투철한 항일투사였다.

    그러므로 일경에 잡혀 조사를 받을 때도 혹독한 고문을 받고 징역 3년 형이 언도되었으나 형기를 채우기 전에 가석방되어 17일 만에 사망해 순국했다.

    시위 주동자들의 직업군을 보면 농민, 상점 경영주, 대서인, 광산업자, 교사, 순사, 미곡상 등으로 구성되어 순수 민간인들이 애국투쟁에 앞장선 사실을 알게 해 준다. 진주의 경우 핵심 지도자 24명 중에 기독교인이 10명 내외, 천도교인 2명, 대종교인 1명, 무종교인 등으로 구성되었다.

    진주 3·1운동을 진행하면서 악기가 동원된 것은 시위 첫날이 아니고 다음 날인 3월 19일 오전 11시라고 시간까지 명시된 내용이 대구교도소 집행지휘서와 대구복심법원 판결문에 기록되었는데 큰북, 작은북, 코르넷, 나팔이 동원되어 사람들의 뇌리에 긴 시간 동안 기억되는 역할을 했다.

    이번에 건립한 진주와 서부경남 3·1운동 발상지 기념비는 이 같은 의로운 투쟁을 기리는 일이며 김재화 선생의 생가가 지금까지 고스란히 남아있는 역사적 장소로 교유문의 작성지이며 투쟁의 시기와 방법 등 구체적 활동방향을 결정한 곳이기 때문에 작은 비를 세우게 되었다.

    김재화 선생은 명석면 3·1운동 지도자 김용익, 강기수 등을 이끌어 항일의 선봉에 서게 했고 하동, 사천, 고성, 합천 등지로 점점 퍼져나가는 생동감 있는 독립선언서가 되게 했다.

    앞으로 생가복원도 이루어져야 할 것이기 때문에 1차적 사업으로 기념비를 세우게 되었다.

    3·1운동에 관한 역사적 문화유산이 없어지기 전에 지금 그 모습이 남아 있는 교회 종을 찾아오고 독립선언서와 격문 그리고 교유문을 인쇄한 등사기 등을 찾아 한곳에 모아두고 기념하는 기념관 건립이 시급한 일이다.

    추경화(충효예 실천운동본부 진주지회장 독도사랑운동본부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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