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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1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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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향기] 오원철 전 청와대 수석

창원공단 설계한 전 청와대 수석
“40년 새 이렇게 큰 도시가 돼 국가 공헌 가슴 뿌듯”

  • 기사입력 : 2010-03-30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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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원공단의 상징인 공업탑을 찾은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 청와대 경제수석 비서관을 지낸 오원철씨./김승권기자/

    “1970년 초에 만들었던 도시가 40년 새 이만큼 큰 도시가 돼 국가에 공헌한다는 사실에 가슴이 뿌듯합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 곁에서 오늘의 창원국가산업단지와 창원시를 설계한 오원철(82) 전 청와대 경제수석이 지난 24일 창원시를 방문한 자리에서 박완수 시장과 실·국장 등 간부들에게 건넨 인사말이다.

    오 전 수석은 “1970년대 창원출장소 시절에는 박 전 대통령이 헬기로 창원에 올 때 같이 오곤 했지만 이후에 별로 못 왔고 지난 2004년에 한 번 왔다 갔다”고 회고한 뒤 “고맙다”는 말을 전했다.

    박 전 대통령의 ‘국보(박 전 대통령이 평소 오 전 수석을 부르던 이름)’였던 오 전 수석은 머릿속으로 기대했던 ‘거대한 산’의 모습이라기보다 쉽게 만날 수 있는 동네 어르신과 같았다.

    앉자마자 “윗옷부터 벗고 시작하자”는 말은 비록 팔순은 넘었지만 1970년대 박 전 대통령을 모시고 브리핑하던 그 시절로 돌아가게 하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창원공단이라고 말하는데 우리 땐 산업기지였어. 왜 기진 줄 알아.”

    이렇게 이야기를 시작한 오 전 수석은 “공단은 울산이 처음이야. 그런데 주거 문제가 해결 안돼 박 전 대통령이 이걸 알고 주거를 해결하는 방안으로 설계된 것이 산업기지고 창원이 1호”라고 답했다.

    답답했던지 오 전 수석은 자신의 저서를 준 뒤 페이지를 가리키면서 창원공업기지 조성 과정을 설명했다.

    1968년부터 남북 관계의 긴장이 고조되는 가운데 1973년 1월 12일 박 전 대통령은 연두회견에서 중화학공업을 선언하고 자주국방에 나선다. 이어 청와대에 경제2비서실을 설치하고 박 전 대통령이 총사령관, 경제2비서실은 사령부가 됐다. 정부엔 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중화학공업 추진위원회를 두고 중화학공업 추진위원회 기획단을 설치한다. 오 전 수석은 경제2비서실 수석비서관 겸 기획단장, 김광모씨가 비서관 겸 부단장을 맡았다.

    바쁜 마음에 “창원이 기지로 선정된 이유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던졌다.

    오 전 수석은 “내가 공군 장교로 있을 때 마산, 사천 등지에서 근무했는데 기계공업과 경남 사람의 기질이 맞는 것 같더라”면서 “쇳덩어리로 특정 모양을 만들고 싶어 아랫사람에게 지시했는데 다 안 된다고 하는데 진주 사람인가 누군가 흔쾌히 나섰다”고 일화를 소개했다.

    그는 이어 “이 같은 사람(인재)에 바다를 낀 입지, 기온 변화가 클 경우 발생할지 모르는 철강재의 늘고 줄어듦을 막을 수 있는 따뜻한 기후, 진해 해군정비창과 부산 조선소 등 인근에 연관산업이 있어 방위산업 적지였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박 전 대통령에게 브리핑한 사례도 덧붙였다.

    “박 전 대통령에게 ‘일본에서 제일 큰 기계공장은 히다치로 발전소, 군함용 엔진, 기차, 병기 등 소위 종합기계 메이커인데 창원공업기지를 완성, 탱크, 장갑차, 군함과 항공기용 엔진, 특수강부터 민수용인 각종 기계·장치, 선박·자동차 부품, 객차, 기관차 등이 다 가능하다’고 보고했다”고 전했다.

    오 전 수석은 “창원 인구가 얼마냐”면서 “히다치가 종업원이 8만명이고 1명당 가족을 4명을 잡으면 40만명인데 그 기준에 맞춰 40~50만명 도시 창원을 설계했고 2000만평(6600만㎡)이 필요한데 수도권은 방위산업 특성상 북한과 거리가 가까웠고 나머지는 부지가 없어 적지로 창원이 선택됐다”고 자답했다.

    그는 이어 “공단에 아파트가 있는데 왜 있는 줄 아느냐. 11.7㎞(최초, 현재 15.27㎞)의 창원대로는 왜 있느냐”고 물은 뒤 “창원은 산에 둘러싸여 있고 기지 입구와 뒤쪽만 막으면 외부 침입에서 자유롭고 바다는 수시로 포(砲)를 터뜨리면 됐다”고 혼잣말처럼 이야기했다.

    그는 “대로는 외부 침입이 있을 때 저지선이자 제트기 이착륙장이며 공단 내 아파트는 사원용 숙소가 아니라 외부 침입 때 기동타격대가 적을 저지하는 방어진지”라면서 “공단-주거지를 구분하고 대로를 폭 50m로 설계한 것도 자주국방을 위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오 전 수석은 “창원시청 앞에 대형 광장(3만5000㎡)은 창원(昌原)의 ‘빛날 창(昌)’ 한자가 해(日) 두 개로 이뤄져 있어 태양을 상징하는 의미에서 만들어 놓은 것”이라며 “5만분의 1 지도에서 확인할 수 있는 광장인 만큼 앞으로도 나무를 심지 말고 그대로 유지해 줬으면 한다”고 당부했다.

    그는 “창원이 계속 발전하면서도 당초 계획을 바꾸지 않고 발전한 것이 너무 고맙다”며 “지금 보면 잘못된 구상을 한 것이 아닌 것으로 확인돼 내가 복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오 전 수석은 “결과적으로 국태민안과 유비무환을 위해 국가 방위산업을 위해 심혈을 기울여 만든 도시가 창원이며 이제 원자력기기(두산중공업)와 탱크(현대로템), 군함엔진(두산엔진), 발칸포(S&T중공업) 등을 생산하는, 세계에서도 몇 개 안되는 1000만평 이상의 계획도시이자 방위산업도시로 창원이 더욱 번창해 우리나라 경제를 발전시키고 국가안보를 책임지는 국태민안, 유비무환의 도시가 됐으면 한다”고 바람을 나타냈다.

    오 전 수석의 바람처럼 창원은 14㎞의 8차선 창원대로를 경계로 산업단지와 주거단지로 나누어 놓은 당시 계획대로 성장, 1980년 시로 승격된 이후 2009년 현재 생산액 42조원, 수출 175억달러로 한국 경제의 중추 역을 맡고 있다.

    여기에 세계 시장 점유율 5위 이내인 세계명품 기업 16개가 35개 품목을 생산하고 있다. 오 전 수석이 꿈꾼 자주국방의 산실이 방위뿐만 아니라 국가 경쟁력의 산실까지 된 셈이다.

    오 전 수석은 시종 우렁차고 담담하면서도 자신있는 목소리로 자주국방과 창원이 갖는 역사·시대적 의미를 강조했다.

    창원공단을 설계한 사람으로서 자부심과 자신감, 애정이 물씬 풍겼다.

    그러면서도 그가 모셨던 박 전 대통령에 대해서는 깍듯한 말투였고 곁에 자리한 김광모(77·테크노서비스 대표)·강영택(75·전 포항하우톤 사장) 전 비서관의 역할도 빼놓지 않았다.

    오 전 수석은 박정희 전 대통령으로부터 ‘국보’라는 칭호를 받은 측근이었다면 김 전 비서관은 오 전 수석의 지시를 수행했으며 강 전 비서관은 서울, 창원을 오가면서 현장을 지휘했기 때문이다.

    오 전 수석은 자신의 역할에 대해 “나는 참모였어. 리더가 일할 수 있도록 제 위치에서 최선을 다한, 아니 목숨을 걸고 뛰었다”면서 “리더가 던질 화두에 대해 생각하고 제안할 수 있는 역량을 기르는 것, 그것이 참모의 역할”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도 “죽기살기로 고민하고, 또 고민해야 하며 무엇보다 우리의 역사를 ‘아는 것’, ‘공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길지 않은 인터뷰에도 1970년대,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목숨 걸고 뛴 노력과 고민, 그 열정이 오롯이 담긴 도시가 창원이며 그 땀에 흔쾌히 동참한 창원지역 주민들의 희생이 오늘의 창원 경쟁력에 녹아 있다는 생각을 오랫동안 지울 수 없었다.

    ☞오원철 전 수석은= 1928년 황해도 풍천에서 태어나 서울공대 전신인 경성공업전문학교에 입학했다. 대학 재학 중 1950년 공군 기술장교후보생으로 군에 입대, 이듬해 공군 소위로 임관하면서 서울대 공대 화학공학과를 졸업했다. 1957년 공군 소령으로 전역한 후 시발자동차회사 공장장으로 사회에 첫발을 디딘 후 1961년 국가재건최고회의 기획조사위 조사과장으로 공직에 몸을 담는다. 이후 1968년 상공부 기획관리실장, 상공부 차관보를 거치는 등 승승장구하면서 1971년부터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기까지 경제2수석비서관과 중화학공업기획단 단장으로 경제정책을 사실상 총괄했다. 10여 년 넘는 칩거 후 1992년 기아경제연구소 상임고문을 맡아 1997년까지 일했으며 현재 ‘한국형 경제정책연구소’ 상임고문으로 있다.

    글=이병문기자 bmw@knnews.co.kr

    사진=김승권기자 skkim@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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