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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2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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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안 비경 환상의 섬 (18) 통영 추봉도

바다에선 대마도 정벌 조선 수군 함성 들리는 듯하고
마을엔 민족상잔 아린 상처 흔적 남아있는 ‘역사의 섬’

  • 기사입력 : 2010-05-06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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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산도 망산에서 바라본 추봉도. 2007년 추봉연륙교가 개통됨으로써 한산도와 추봉도를 마을버스가 오간다./이준희기자/

    이국적인 풍경의 추봉도 봉암마을.

    한려수도의 아름다운 비경이 시작되는 섬 ‘추봉도’(386만1031㎡, 424명·197가구).

    올망졸망 흩어진 다도해의 수많은 섬들 사이로 두 개의 산(망산·큰봉산)이 고개를 우뚝 내민 섬은 푸른바다와 끝없이 펼쳐진 몽돌밭이 환상적인 풍경을 자아낸다.

    그러나 추봉도는 민족상잔의 아픔을 간직한 슬픈 역사의 섬이기도 하다. 추봉도는 예부터 지리적 요건으로 인해 군사적 요충지로서의 역할을 담당해 왔다.

    조선조 세종 원년에는 고려시절부터 우리나라 해안지역을 침탈해 온 왜구의 소굴인 대마도 섬 정벌을 위한 출정지였으며, 임진왜란 때에는 이순신 장군이 병선을 배치했을 뿐 아니라 경상도우수영(거제도 가배)에서 통제영으로 연락하는 역참이 있던 곳이기도 하다.

    1419년 세종 1년, 대마도(쓰시마섬)에 심한 흉년이 들자 왜놈들은 대거 우리나라와 명나라 해안까지 떼로 몰려와 양민들을 학살하고 집에 불을 지르는 등 노략질을 일삼았다.

    이에 조정에서는 이종무 장군에게 대마도를 정벌할 것을 명했고, 장군은 추봉도의 곡용포 등지에서 삼남(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세 지방을 통틀어 이르는 말)의 병선 227척과 군사 1만7000명을 집결시켜 대마도로 출정해 단숨에 섬을 점령해 항복을 받아내는데 이를 ‘기해동정(己亥東征)’이라 한다.

    한산도의 최고봉 망산(望山·293m)에 올라 추봉도 아래로 펼쳐진 아름다운 다도해의 풍경을 보고 있노라면 굽이굽이 펼쳐진 바다 위로 수백척의 군선이 돛을 내걸고 정벌에 나서는 위용에 찬 조선수군의 모습을 보는 듯한 착각에 빠져든다.

    통영여객선터미널에서 30여 분 거리의 한산도 제승당 입구에 도착해 한산섬 해안로를 따라 7~8㎞가량 가다 보면 추봉연륙교를 만날 수 있다.

    한산도와 추봉도를 연결하는 추봉연륙교는 2007년 여름에 다리가 놓였다. 섬과 섬 사이를 연결하는 추봉연륙교가 개통되면서 추봉도로 가는 교통(배편)이 훨씬 수월해졌다. 예전 추봉도는 하루 두 번밖에 없는 배편으로 큰 불편을 겪었지만 한산도는 한 시간 간격으로 배편이 있어 섬주민들이 한산도로 건너온 후 마을버스를 이용해 섬을 오간다.

    추봉도는 섬의 중앙에 바닷물이 깊숙이 파고 들어와 아늑한 호수를 연상케하는 소만에 자리한 ‘추원’과 ‘예곡’마을이 정답게 마주하고 있으며, 동쪽 끝의 깊숙한 개안(浦口)에는 ‘곡룡포’ 마을이 들어앉아 있다. 그리고 서쪽 끝 가파른 큰봉산 아래 바다로 뻗어나간 개안에 ‘봉암’마을이 있다. 추봉연륙교를 지나 오른쪽 마을로 접어드니 이국적인 풍경의 봉암마을이 나온다.

    봉암(蜂岩)이란 지명은 옛날 이곳에 있는 벌여(蜂璵)라는 바위섬에 벌이 많아 부르게 된 지명이라고 한다. 이곳 추봉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절경이 바로 만곡을 따라 1㎞가량 펼쳐진 몽돌해변이다.

    ‘모오리돌’이라고도 하는 몽돌은 모가 나지 않고 둥근 돌을 뜻하는데 파도와 바람이 세월로 깎아 만든 돌로 ‘봉암수석’이라고도 부른다.

    해변 입구 안내판에는 ‘몽돌을 가져가지 말라’는 경고문이 붙을 정도로 작고 까만 몽돌이 탐스럽다. 햇살에 반사된 파도와 바닷물을 머금은 까만 몽돌은 눈이 부시도록 아름답다. 몽돌을 밟을 때마다 들리는 ‘사그락~사그락’ 소리와 파도에 밀려 ‘촤르르~ 촤르르~’하는 소리는 자연이 들려주는 하모니다. 돌 하나하나가 섬 모양과 이곳에 사는 사람들의 둥글둥글한 성격을 닮은 듯하다.

    봉암마을 해안 1㎞가량 펼쳐진 몽돌해변.

    낚시꾼들이 제철 맞은 봄다리를 잡고 있다.

    또한 해안을 따라 생겨난 마을 산책로는 아름드리 푸른 소나무와 맑고 푸른 바닷물, 까만 몽돌, 시원한 바닷바람이 어우러져 색다른 분위기를 연출한다. 저 멀리 바다 한가운데에서는 낚시꾼들을 태운 배들이 제철을 맞은 봄도다리를 잡느라 여념이 없다.

    여름철이면 해수욕을 즐기려는 많은 사람들로 붐비는 봉암 몽돌해수욕장은 휴가철이면 민박집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다. 대신 마을 부녀회에서 운영하는 대형 천막에서 여름밤 바다를 배경으로 파도소리 들으며 잠을 청할 수 있는 낭만을 즐길 수 있다.

    마을 입구 한편에서 민박집을 운영하는 김수영(80)할머니는 “봉암마을은 물도 깨끗하고 섬사람들의 인심도 넉넉해 휴가를 즐기기에 최고다”며 “특히 몽돌해수욕장에서 아이들과 물놀이를 하다 보면 하루가 금세 지나간다”고 말한다.

    어린 나이(20살)에 매물도로 시집을 간 할머니는 55년 동안 매물도에서 생활하다 5년 전 추봉도로 건너왔다. 할머니는 “매물도에 비하면 추봉도는 육지에서 가깝고 사람도 자주 구경할 수 있어 너무 좋다”고 말한다.

    바닷가 갯마을에 태어나 바다와 더불어 살아온 사람들. 그들의 하루 일과는 쉴 틈이 없다.

    봉암마을을 벗어나 한등을 넘어서면 추원마을이다. 예곡마을과 마주한 추원마을은 6·25 당시 유엔군의 포로수용소가 있던 곳이다.

    1952년 5월, 보리베기와 타작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던 어느 날, 섬주민들은 갑자기 밀어닥친 미군들에 의해 강제로 쫓겨났다.

    한순간에 삶의 터전을 잃은 주민들은 인근 마을로, 혹은 친척집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오갈 데도 없는 사람은 한산국민학교 운동장에 천막을 치고 피란민 아닌 피란민 신세로 전락했다. 이후 정부에서 창좌리 입정포에 임시 가건물을 마련해 주민들을 이주시켰으나 엄동설한의 모진 추위에 노약자와 어린 아이들이 큰 고초를 겪었다.

    마을 주민 정두진(72·당시 14살)씨는 “어느 날 미군 해군다이버들이 마을 앞바다의 수심을 일일이 재더니 4~5일 후 큰 배(LST)를 몰고와 우리가 살던 집과 밭 등을 불도저로 그대로 밀어버렸다”며 “난리 속에 먹을 것도 제대로 챙겨나오지 못해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 말하며, 지난날의 아픈 기억을 더듬는다. 당시 추봉도 포로수용소에는 포로들 중 가장 악질적인 포로 1만명을 수용했다고 한다.

    예곡마을 포로수용소 정문 기둥 일부.

    추원과 예곡마을 중간 동반령에 남아 있는 한국전쟁 당시 지휘사령부 터.

    예곡마을 역사를 알려주는 비석.

    53년 7월 27일 휴전협정 이후 수용소가 폐쇄되면서 다시 마을로 돌아온 섬주민들은 호미와 괭이 등으로 포로수용소 건물과 시멘트 도로 등을 걷어내고 대신 논밭을 일궈 오늘에 이르렀다. 예곡마을 한편에도 이곳에 포로수용소가 있었던 사실을 알려 주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그러나 예곡마을 역시 포로수용소가 있던 흔적은 사라지고 그나마 마을 중앙에 당시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포로수용소 정문기둥 일부와 추원과 예곡마을 중간지점인 동반령에 당시 지휘사령부 터가 조금 남아 있을 뿐이다.

    예곡마을 양덕윤(83)옹은 “당시 먹을 것이 없어 주민들이 굶어가며 건물을 허물고 논밭을 일궜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포로수용소를 조금 남겨뒀더라면 후손들의 산 교육장이 될 수 있었을 텐데…”라며 아쉬움을 드러낸다.

    예곡마을 바닷가에서 주민들이 바지락을 캐고 있다.

    물 빠진 예곡마을 바닷가에는 마을 아낙네들이 바지락을 캐느라 여념이 없고 호미질을 할 때마다 제법 큰 씨알의 바지락이 하나 둘 ‘툭툭’ 튀어 나온다. ‘바로 이 재미에 아낙네들이 바지락을 캐는구나!’.

    아낙네들은 팔이 아픈 줄도 모르고 열심히 호미질을 한다.

    예곡마을 입구에는 마을의 역사를 알려주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비문에는 “임진왜란 전부터 인접 거제 가배에 병영 주재 당시 이곳(경상우수영)에 관기를 주거시켜 병사들을 위안케한 기생촌이라 하여 ‘여기곡’(女妓谷) 또는 ‘여곡’(女谷)이라 불러왔는데, 1925년 마을 출신 참봉 이강조 어른께서 제4대 한산면장 재임 중 마을의 선비 유지들과 뜻을 같이하여 ‘예곡(禮谷)’이라 개칭하였다”고 적혀 있다. 한마디로 기생촌이 예절바른 마을로 변한 것이다. 그래서 나이 많은 어르신들은 마을의 유래를 알려주는 비석이 못마땅하다.

    추봉도의 맨 안쪽에 자리 잡은 곡룡포 마을은 언덕 위의 폐교된 추봉초등학교를 지나 가파른 고갯길을 2km가량 가다 보면 급경사를 이룬 언덕 아래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방파제 공사가 한창인 곡룡포 마을은 요란한 기계소리만이 정적을 깨뜨릴 뿐, 소박한 섬 주민들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가는 길

    통영여객선터미널에서 오전 7시~오후 5시(여름 오후 6시) 한 시간 간격으로 한산도를 오가는 카페리(30분 소요)를 탄 후, 매시 정각에 추봉도와 한산도를 오가는 마을버스를 이용하면 된다. 주의할 점은 한산도행 배편 종료시간(제승당 오후 5시30분)에 맞추려면 한산면사무소 앞에서 오후 5시 반드시 버스를 타야 한다.

    ☞잠잘 곳

    추봉도에는 동백민박 (☏649-8074), 추봉펜션 (☏648-1212), 민박집(☏018-279-8556)등 많은 민박집들이 있어 숙박을 하는 데는 무리가 없다.

    글·사진=이준희기자 jhlee@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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