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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2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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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칼럼] 꽃과 노인- 이동이(수필가)

  • 기사입력 : 2010-09-10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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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난 여름은 등허리에 불개미가 지나간 듯 따가웠다. 얼마나 더웠으면 강가에 조약돌도 불씨처럼 뜨거웠고 길도 강으로 뛰어들었을까. 그런데 절기인 백로가 지나자 그토록 위풍당당하던 기세가 꼬리를 감췄다. 그동안 몸과 마음이 많이 지쳐 있었던 탓인지 피부에 와 닿는 바람에 가을의 정취가 더욱 진하게 느껴진다.

    수액을 빨아올리는 생목들의 힘살에 힘주어 뻗어나간 가지마다 구름을 쓸고 간다. 하늘도 쾌청하게 개었으니 풀어헤친 수박의 살진 가슴 훔쳐놓고 여유롭게 가을을 걷는다.

    이런 날이면 유순한 바람의 손이 이끄는 대로 무작정 내달리고 싶어진다. 꽉 다져둔 감정들도 덩달아 들썩인다. 왠지 그리운 사람에게서 연서가 올 듯도 하고, 저 산을 휘돌아 온 파랑새가 희소식을 물어다 줄 듯도 하다. 혼자만의 들뜸이 아닌 것은 평행을 이루며 걷는 사람들 표정을 보면 안다. 아마 그들도 나처럼 좋은 일이 있을 거라는 마음가짐으로 플라시보 효과까지 보고자 함일 게다. 기분 좋은 일은 스스로 만들어 가는 일이기에.

    사림동 주택가에서 대로로 난 길가에 봉숭아꽃이 피어 있다. 분홍 꽃이 먼저 피었고 주홍 꽃은 아직 반밖에 벙글지 않았는데, 여러 포기가 심어져 있어 매우 소담해 보인다. 그 옆으로 맨드라미, 백일홍, 그리고 곧 퍼붓듯 피어날 코스모스가 있어 더욱 정겹다.

    오늘은 그동안 이 길을 오가며 꽃 보는 즐거움을 누렸기에 인사말이라도 전해야 될 것 같아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그분이 보이지 않는다. 아마 또 퇴비가 든 검정 봉지와 꽃삽을 들고 인근의 공터로 나가 꽃모를 심고 있을 터였다.

    지난 여름. 중앙동 도로변에 있는 가로수 아래에 70대 노인이 몸을 움츠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별 관심이 없었기도 하지만 시선을 줄 여유가 없었기에 그냥 스쳐갔다. 나는 그분의 곁으로 바싹 다가가서 물어보았다.

    “할머니, 여기서 무엇을 하시는지요?”

    “응, 오가는 이들에게 국화 향을 안겨 주기 위해서 심는 게야. 운전자들도 이 꽃들을 보고나면 한결 마음이 평온해질 게야” 하시며 만족스럽게 웃으셨다.

    알고 보니 가까운 곳에 찻집을 운영하고 있는데, 세련된 실내구조 공간마다 야생화와 제철의 꽃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곳을 찾는 이들은 할머니가 손수 꾸미신 전원 풍경 한 점씩 얻어간다고 했다.

    그때 보았던 할머니를 우연찮게 사림동에서 만나게 되었을 때도 꽃모를 한 아름 안고 계셨다. 이제는 찻집을 그만두었으나 여전히 꽃과의 열애는 변함없으신 듯했다. 내 한 몸 수고로 오고 가는 이들에게 국화꽃 향기를 나누어준 그분은 결코 누구에게 칭찬이나 받자고 한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꽃을 심어 정서가 메마른 이들에게 잠시 동안이나마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게 해주고 싶은 마음이 절로 우러나서 그리하였을 것이다.

    봉숭아꽃이 피면 봉숭아 꽃물 손톱에 곱게 들이라고 손수 꽃잎 따 주시던 충주에 계시는 K선생님과 가을이 오면 산국화를 말려 봉투에 넣어 보내주는 친구가 생각난다. 나도 누군가에게 그토록 깊은 즐거움을 준 적이 있었던가. 바빠서. 일이 많아서. 이런저런 변명으로 많은 시간 그냥 흘려보내지 않았는지….

    번잡하고 초고속력을 원하는 세상이라 사람의 향기가 더욱 그립다. 때문에 길가에 꽃모를 심는 노인의 행적이 그토록 귀하게 여겨지고 진한 감동을 받게 되는가 보다. 아름다운 인생을 꽃향기 그윽하게 지내시는 그분을 오늘은 꼭 만나볼 양으로 이곳저곳 둘러본다. 저쯤에서 꽃향기가 피어난다.

    이동이(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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