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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17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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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칼럼] 누가 주인인가- 최영인(아동문학가)

  • 기사입력 : 2010-11-12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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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늘이 파랗다. 억척스럽게 덥던 지난 여름은 언제 그랬냐는 듯 도망치듯 달아나고, 솨한 바람은 잎들을 붉게 물들이고 있다. 사람들은 잠시 왔다가는 가을을 만나러 먼 길을 마다않고 설렘 가득한 보따리를 메고 길을 떠난다. 먼 곳은 아니지만 나도 모자를 쓰고, 등산화를 신고, 카메라랑 비닐봉지 몇 개도 잊지 않고 챙겨 뒷산을 찾는다. 우리 집 가까이 이렇게 마음만 먹으면 갈 수 있는 산이 있다는 건 큰 행복이다. 게다가 산자락에 위치한 우리 채마밭은 식구들에게 웰빙 식탁을 제공해 준다.

    채마밭까지는 자동차로 10분이면 갈 수 있지만 오늘은 카메라를 들고 천천히 걷기로 했다. 파란 하늘에 그어진 전깃줄엔 예닐곱 마리의 제비들이 나란히 앉아 재잘거린다. 뉘 집인지 예쁜 집 담벼락엔 어릴 적 보았던 맨드라미랑 분꽃이 아기자기 피어 있고 꽈리나무엔 꽈리가 조롱조롱 달려 있다. 과수원 사잇길로 접어들자 온갖 가을 야생화들이 활짝 피어 옛이야기들을 나누는 듯 귀가 간지럽다. 자동차를 타고 지날 땐 들을 수 없었던 아름다운 자연의 숨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오고 있다.

    이웃집 밭엔 벌써 배추가 한아름이 되도록 컸다. 하지만 산자락에 심어둔 우리 밭엔 벌써 몇 차례나 씨를 뿌렸지만 허탕이다. 요즘 들어 부쩍 노루와 고라니의 침범 흔적이 심하다.

    지난봄에 엉덩이를 치켜들고 머리만 풀숲에 처박고 있는 아기 고라니를 남편이 보고도 잡지 않고 쫓아 보낸 게 화근이었다. 처음엔 싹둑싹둑 잘라먹은 상추를 보고 애꿎은 등산객들만 의심했다. 어느 날 무성한 고구마 순이 말끔하게 줄기만 남아있는가 싶더니 며칠 후엔 뿌리까지 몽땅 파먹고 없어진 것이다. 그나마 고추는 넉넉하게 심었기에 한쪽을 내어주고도 빨간고추를 조금은 말릴 수가 있었다. 속이 상한 나는 시골 장에서 쥐덫을 두 개나 사 왔다. 남편은 산짐승들이 그 쥐덫으로 되겠냐고 핀잔을 주곤 그냥 밀쳐두었다.

    “어이구 고놈의 새끼고라니만 잡아서 목줄을 매어놓았어도 괜찮을 걸.”

    엉망진창인 밭을 볼 때마다 푸념처럼 내뱉지만 들깨랑 취나물이랑 머귀나물 등 고라니가 먹지 않는 푸성귀들도 많이 있어 저녁 밥상은 언제나 풍성하다. 고라니와 노루보다 더 나쁜 건 전기톱으로 애써 키운 헛개나무를 밑동만 남기고 베어간 사람이다. 먹을 만큼 가지만 꺾어 갔으면 내년에 또 꺾어 먹을 수 있으련만, 언제 또 옆에 있는 나무가 없어질지 불안하기만 하다.

    알알이 열매를 달고 있는 들깨를 베어서 돗자리에 말리고 누렁호박을 찾으러 여기 저기 숲을 뒤질 때, 야생화를 잘 아는 벗이 산에서 내려오다 반갑게 인사를 한다. 뭔지도 모르고 내 손에 들고 있는 공 같은 누런 열매를 보고 그건 하눌타리라고 하는데 말려서 달여 먹으면 심장에 좋단다. 그리고 밭에 지천으로 핀 보랏빛 칫솔 같은 꽃향유를 가리키며 꽃잎을 살짝 쪄 말려서 차로 마시면 좋다고 일러주고 간다. 그 말에 나는 가지고 간 비닐봉지에 꽃향유를 한보따리 따 담는다. 화아한 꽃향기에 온몸이 녹는 듯 취해 있을 때 사마귀 한 마리가 따라가려는 듯 비닐봉지 속으로 뛰어든다. 어릴 적 사마귀를 보고 있으면 봉사가 될 수도 있다는 말이 생각나 약간 겁이 나기도 했지만 나는 살짝 봉지를 내려놓고 카메라 셔터를 누른다. 밭에서 이렇게 기웃거리다 보면 산 정상에 가는 걸 잊고 그냥 내려오기가 일쑤지만 자연이랑 함께 어울려 있을 땐 참 행복하다.

    원래 이 밭의 주인은 이 산속에 짐승들이었을 게다. 사람들은 그것을 빼앗아 금을 매기고 거래를 했을 것이다. 농사를 짓는다고 사람들이 휘두르는 연장이 어쩌면 이 자연에 훼방꾼일 게다. 자연은 굳이 애써 뿌리지 않아도 수확해올 나물이며 열매들이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심어놓은 배추 맛에 길들여진 고라니가 입맛을 잃어 이제 아무거나 먹을 수 없게 되는 건 아닐까. 배추 심기를 포기한 밭고랑엔 구멍 뚫린 검은 비닐만 길게 늘어져 있다.

    “여기요, 여기!”

    바지에 달라붙은 풀씨들을 털며 돌아나오려 할 때 밑동만 남은 헛개나무에서 가느다랗게 자란 몇 가닥의 어린 가지가 아직은 살아 있다고 손을 흔든다.

    최영인(아동문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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