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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칼럼] 옛 문화의 향기 속에서- 정희숙(동화작가)

  • 기사입력 : 2011-01-07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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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난 가을, 부여에 다녀왔다. 남편 친구들과 떠난 1박 2일의 여행이다.

    부여에는 잠자던 사비성의 영화가 되살아나고 있었다. 아담하고 깔끔한 펜션에서 묵은 다음, 부소산의 고란사 가는 길. 안개 속에 단풍이 곱다. 백제 때도 단풍은 붉었으리. 세월이 흘러도 변함 없는 건 자연뿐이런가. 낙화암에는 전설만 남았을 뿐 삼천궁녀의 자취는 간 곳 없다. 백화정, 정자만 날아갈 듯 사뿐히 얹혀 있다.

    잠시 백화정에 앉아 생각에 젖어 본다. 능소화가 지듯, 백마강 푸른 물에 꽃다운 목숨을 바쳤을 여인들. 아리따운 젊음을 삼켰을 백마강은 짙은 안개 속에서 깨어날 기색이 없다.

    정림사지에는 돌탑 하나 덩그러니 서 있다. 텅 빈 절터를 홀로 지켜온 5층 석탑. 가까이서 대하니 장중한 기품이 격조 높다. 패망한 나라에서는 불탑마저 치욕을 피해 갈 수 없었나 보다. 오만불손한 당나라 소정방이 승리의 기쁨을 새겨 놓았다. 온갖 수모를 참으며 1500여 년의 세월을 늠름하게 견딜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450여 점의 유물을 품었던 능산리에는 복원 공사가 한창이다. 능산리가 도굴꾼의 손길을 피할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가. 그곳에서 출토된 ‘금동대향로’는 백제문화의 꽃으로 불린다. 금동대향로에는 산과 인간, 동식물 등 삼라만상이 담겨 있다. 향을 피우는 일에도 그토록 섬세하고 세련된 멋을 부렸음이 가히 감동적이다.

    서라벌에 안압지가 있듯 사비성에도 아름다운 연못이 있었다. 한반도 역사상 최초의 인공 연못, 궁남지. 서동 왕자와 선화 공주의 전설이 깃든 곳이다. 아이들이 역사를 배우느라 떼 지어 다니며 해설사의 설명을 듣고 있다.

    왕릉원에는 의자왕과 태자 융의 단이 있다. 굴욕적인 항복 끝에 적국으로 끌려간 의자왕. 오랜 세월 뒤인 2000년에 겨우 낙양 무덤의 흙 한줌 가져와 무덤처럼 해놓았다. 700여 년의 사직을 불과 며칠 만에 내준 것만도 원통한데, 이역만리 남의 땅에서 숨졌으니 얼마나 애달프랴.

    정오가 지나자 안개가 걷힌다. 마음에 쏙 들었던 숙소에 이어 날씨까지 따뜻하니 다들 만족해한다. 옛 문화의 향기를 맡으며 알찬 여행이라고 좋아한다. 그쯤에서 여행을 끝냈더라면 좋았을 걸. ‘백제문화단지’까지 간 것이 잘못이다.

    마지막 간 곳에는 웅장한 건물에 비해 볼거리도 부족하고 박물관에서 본 것들과 중복된 것이 많다며 볼멘소리다. 개인적인 욕심으로 여행 일정을 무리하게 잡아 즐거웠던 여행의 말미를 망쳤다는 자괴감이 든다.

    일행은 또 사비성의 복원에 많은 비용이 들었을 텐데, 이름난 행사 때만 반짝 효과를 누리다 관광객이 줄어들까 봐 우려한다. 관광객이 다시 찾게 하거나 외국 손님을 끌려면 백제 문화만의 특징을 느낄 수 있어야 할 텐데, 부여 박물관에도 백제 문화재보다 선사시대 유물이 더 많더란다. 걸음이 빠르기에 건성으로 보는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나 보다.

    돌이켜 보니 백제 문화재는 명성에 비해 남은 게 턱없이 적은 듯하다. 찬란한 백제의 문화재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하긴, 나라가 망하면서 의자왕을 비롯해 무려 1만3000여 명이 당으로 끌려갔다니 살림인들 온전했으랴. 남은 문화재도 일본으로 많이 건너갔을 것이다. 왕릉원의 여러 무덤도 거의 다 도굴당했다. 잃어버린 문화재를 찾을 길이 묘연함은 멸망한 나라 후손의 비애가 아닐는지.

    연평도 사건으로 인해 나라 안팎이 불안과 긴장에 빠져 있다. 일본은 호시탐탐 독도를 노리고 있다. 중국도 우리 역사를 왜곡하려는 술수가 뻔하다. 누군가, 역사는 현재를 비추는 거울이며 미래를 밝혀야할 등대라 했다. 동서고금을 통해 역사를 도외시한 나라는 결코 융성한 사례가 없단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니 우리 역사를 바로 아는 것, 그것이 나라사랑의 첫걸음이랄 수 있겠다. 이번 방학엔 아이들 손잡고 역사의 고장으로 떠나 보자. 옛 사람들이 남긴 자취에서 삶의 지혜를 찾아볼 일이다.

    정희숙(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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