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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칼럼] 화해와 용서의 삶- 이광수(소설가)

  • 기사입력 : 2011-01-21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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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브라질의 소설가 파울로 코엘료는 상처받은 사람보다 상처 준 사람의 가슴이 더 아픈 법이라고 했다. 그것은 남에게 준 상처의 덧이 결국 부메랑이 되어 자기 자신에게 되돌아 오기 때문이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 가면서 인간관계에서 빚어지는 무수한 갈등은 항상 자신이 남으로부터 상처받았다는 피해의식에서 비롯된다.

    자기 자신이 남에게 준 상처에 대해서는 한없이 관대하면서도 내가 받은 상처는 사소한 것일지라도 잘 잊지 않고 마음에 담고 살아간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했다. 평생 그 사람과 상종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나와 연관된 얽히고 설킨 인간관계에서 지극히 우연히 반대의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내가 원수처럼 생각했던 사람이 은인이 되어 버리는 피할 수 없는 상황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인과응보의 순리를 기대하는 것이 인간의 공통된 심리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종종 벌어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상대방을 용서하고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사람은 혼자서 살 수는 없다. 하늘에서 떨어진 존재도 아니고 부모라는 내 생명체의 근원이 있는 이상 피할 수 없는 업보이다.

    문제는 세상사가 인간의 존재가치가 무엇인지조차 모를 만큼 몰인간적으로 변해 가고 있다는 점이다.

    자본주의라는 물신지향적인 삶이 배태한 정신적 빈곤은 인간의 의식세계를 혼란에 빠뜨리게 한다. 내가 하는 짓이 옳지 않은 줄 알면서도 현실이라는 미명하에 속물근성의 노예가 되어 버리고 만다.

    사는 게 전쟁이라고 했듯이 치열한 경쟁 속에서 낙오되지 않으려는 인간의 이기심이 그렇게 충동질한다.

    자신이 행한 삶의 수단과 방법이 정도를 벗어났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결과물로서 보상하면 될 것이라고 스스로를 위안하고 합리화시킨다.

    자신이 소속된 집단의 이익은 곧 나의 이익으로 직결된다.

    따라서 내 이익을 침해받지 않으려면 그 집단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내재된 자신의 본성을 집단의 규범속에 묻어 버려야 한다. 여기에 인간적인 갈등이 생긴다.

    이처럼 우리는 현실적인 삶 속에서 서로 상처 주고 상처 받는 일의 연속선상에서 갈등하며 모진 목숨을 이어간다. 그러나 상처 받은 것이 꼭 부정적인 의미로만 작용하지 않는다. 어쩌면 인간이 인간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런 행동을 반복하는지도 모른다.

    콜린 맥컬로는 ‘가시나무새’에서 상처 받은 영혼은 아름답다고 했다. 큰 상처 없이 살아간 인생이 과연 치열하게 살아간 인생인가 라고 반문한다.

    켈트족의 전설에 의하면 가시나무새는 자기 가슴을 가시에 찔려 붉은 피를 흘릴 때 비로소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며 죽어간다고 한다.

    우리 인생도 길다면 긴 삶의 여정에서 가슴 찔리는 깊은 상처를 받고, 또 그 상처를 치유하려는 치열한 노력을 하는 가운데 자신이 선택한 삶을 제대로 살 수 있는 용기를 가질 수 있다.

    단 한번도 가시에 찔려보지 않고, 그래서 가장 아름다운 노래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살아온 인생은 아마 참 가여운 인생일지도 모른다.

    물론 여기에 오만과 편견이 개입할 수도 있다.

    하지만 화해와 용서라는 마음의 문이 열리면, 오만과 편견이 저지르는 상처 주기는 오히려 인생의 자극제로 작용할 수 있을 것이다.

    항상 상처받았다는 피해의식에 젖어 살기보다, 화해와 용서로 받아들일 때 이 세상은 그런대로 살 만한 가치가 있지 않을까.

    이광수(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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