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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16일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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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의 길] 창원 동읍 자여역~김해 진례면 생법역

경남의 길을 걷다 (7) 이야기가 있는 옛길 '자여도' (상)
세월을 거슬러 만나는 옛사람들의 정취
구비구비 이어진 길 구구절절한 사연들이…

  • 기사입력 : 2011-02-24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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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탐방객이 창원시 동읍 자여에서 김해 진례로 넘어가는 눈 덮인 노티재를 걸어가고 있다./김승권기자/

    길도 생로병사가 있다. 지금 우리가 다니는 이 길도 필요에 따라 생겼다가 그 소임을 다하면 사라진다.

    매일 매일 무심코 다니는 이 길, 길 밑에 또 다른 길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경남의 길을 걷다’는 이번에는 세월을 거슬러 이야기가 있는 옛길을 찾아 나섰다.

    이번 주부터 세 차례에 걸쳐 소개될 곳은 자여도(自如道)의 주요 역과 거기에 얽힌 이야기다.

    자여도는 조선시대 창원도호부 전역을 중심으로 한 역도(驛道)로서

    찰방(察訪:지금의 역장)이 주재하던 자여역의 이름을 딴 명칭이다.

    자여도의 분포 범위는 지금의 창원시를 중심으로 그 동쪽의 김해와 서쪽의 함안을 아우른다.

    자여도의 동쪽 길은 자여역에서 생법역-남역-덕산역으로 이어져 낙동강 하구에 이른다. 서쪽 길은 신풍역-근주역을 지나 산인을 거쳐 함안과 내서에서 칠원을 지나 낙동강을 건너는 길로 갈라진다. 남쪽 길은 안민역-보평역-적항역을 경유하여 김해도호부에 이르는 해안교통로이다. 북쪽 길은 창인역을 거쳐 낙동강을 건너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영포역을 거쳐 낙동강을 건너 대구 방면으로 갈 수 있다.

    자여역이 있었던 창원시 동읍 자여리 일대.

    2월 중순, ‘자여도’ 책을 지은 역사학자 최헌섭 두류문화연구원장과 자여역에서 생법역까지 걸었다. 자여역은 지금의 창원시 의창구 동읍 송정리 자여마을에 있었고, 생법역은 김해시 진례면 산본리 관동마을에 있었다.

    자여마을까지는 창원역에서 마을버스가 자주 있으며 10분 거리다. 자여마을 입구에는 ‘역사의 고장’이라는 이정표가 탐방객을 안내한다. 그러나 어떤 역사를 가지고 있는지 자세한 안내가 없어 아쉽다. 옛 자여역사는 자여리 151-51 송정1구경로당 일대로 추정된다. 그곳에 자여역의 찰방선정비 3기가 있어 역터임을 일러준다. 이 비는 현재 근처 주민자치센터로 옮겨 보존하고 있다. 또 동읍농협자여지점 입구에 역수(驛樹)였음직한 오래된 회화나무 한 그루가 자리를 지키고 있다. 정월대보름이면 여기서 제를 지내며 마을안녕을 기원한다.

    송정1구경로당과 맞은편 농협 일대가 자여역의 관아와 부속건물이 배치된 곳으로 보이며 그 사이의 도로가 옛 자여도이다. 노폭은 약 8m 안팎으로 여겨진다. 이 폭은 내서농협 하나로마트 터에서 발굴된 고려~조선시대의 관도와 비슷하다. ‘창원부읍지’에 따르면 자여찰방은 종6품이고, 사무를 보던 역리(驛吏) 64인, 관인을 관리하던 지인(知印) 14인, 잡무를 보던 사령(使令) 열 사람, 대마 2필, 중마 2필, 소마 10필이 있었다고 나온다. 임진왜란(1592)때 역이 타고 백성은 모두 흩어졌다가 1611년 다시 설치되었다.

    생법역지로 추정되는 김해시 진례면 산본리 관동마을 입구.

    생법역까지는 대략 20리 길, 8㎞ 정도다. 자여역의 동남쪽으로 길을 잡아 자여초등교를 지나 노티재(露峴)를 넘으면 생법역이 나온다.

    자여초등교 뒤쪽 쥐산의 서남쪽 끝자락에는 일제강점기 조업한 독가마가 있었는데 도로가 나면서 헐렸다. 노티재 들머리는 우곡저수지에 잠겼고, 고개로 이르는 길은 골짜기의 북쪽을 거슬러 오르도록 열렸던 것으로 보인다. 우곡저수지 입구에서 우곡사로 가는 갈림길 왼쪽길을 잡아 저수지를 돌아가면 노티재 가는 길이다.

    우리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들이 이 길로 김해를 넘나들었던 것이다. 지금은 많이 이용하지 않아 조용하고 한적한 산길이다. 계곡을 따라 오르는 지금 길은 거의 옛길과 달라지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노티재는 역제가 운영될 당시에는 창원부와 김해부의 경계를 이루던 곳이다. 임진왜란 때 왜구들이 부산을 거쳐 김해읍성을 함락하고 진주로 가기 위해 이곳으로 왔을 때, 경상우병사 유숭인이 항거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퇴각하였다. 고개 바로 아래까지 농사를 지었던 흔적이 보인다.

    노티재를 넘어서면 김해 진례면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 일대는 김해복합레저타운 예정지로, 곳곳에 문화재 시굴조사가 진행 중이다. 첫 마을이 시례리 신기마을. 동국여지승람 역원에는 이곳에 노현원(숙박시설)이 있다고 했다. 김해에서 창원으로 이르는 길손들에게 잠자리를 제공했을 것이다. 옛길은 대체로 지금의 1042번 지방도와 유사한 선형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길가에서 만나게 되는 비석들과 고지도상에 묘사된 선형이 그리 헤아리게 한다. 생법역까지는 1042번 지방도를 따라 걷는다. 시례리 하촌마을에서 반효자(潘孝子)와 조효녀(曺孝女)의 정려비 2기를 만나게 된다.

    시례리를 지나 옆 마을 송정리 토성마을에는 삼국시대 때 쌓은 토성이 있다. 토성 남동쪽 신안리 신안마을에는 움덤과 돌덧널무덤을 주체로 한 삼국시대의 고분군이 있다. 송정리 일원에는 도예촌이 형성되어 있고, 클레이아크김해미술관이 있어 가는 길이 심심치 않다.

    조금 서쪽에 있는 신안리 무송마을에는 무송저수지가 있다. 해동지도에는 이 저수지 앞으로 옛길이 그려져 있다. 이 못의 북쪽 모서리 개울 곁에는 삼충대(三忠臺)라 새긴 비석이 있다.

    저수지 옆으로 KTX가 힘차게 달린다. 진례터널을 지나 창원중앙역으로 가는 길이다. 1Km쯤 가면 산본리 용전 마을숲이 나온다. 이를 지나면 옛 신월초등학교터에 조성한 가야문화예술관이 반긴다. 드디어 생법역지로 추정되는 관동마을에 당도한다. 관동(館洞)은 역관(驛館)에서 비롯한 이름일 게다. 마을 입구 산자락 끝에 기와조각 등이 발견되었고, 소나무와 팽나무 군락이 있어 역터로 추정된다. 생법역(省法驛)은 ‘여지도서’에 동쪽의 남역과 30리, 남쪽의 적항역과 20리, 서쪽의 자여역과 15리, 북쪽의 대산역과 45리 떨어져 있고, 대마 2필, 중마 2필, 복마 8필이 있었고, 역 종사자는 53명이라 했다. 거리는 창원부읍지와 약간 차이가 난다.

    자여역 찰방선정비.

    △ 자여역 찰방선정비

    예전에는 더 많은 수의 비석이 있었다고 하는데 새마을운동 때 도로에 묻히기도 하고, 쇠로 만든 비는 누군가 훔쳐갔다고 한다. 주민자치센터에 있는 3기는 ▲찰방 최휘지 청덕선정비 ▲찰방 유천지 □□선정비 ▲찰방 유성운 선정비다. 최휘지는 남원 사람으로 1631년 9월에 부임하여 1634년 9월까지 재직하였다. 유천지는 상주 사람으로 1658년 12월에 부임해 1660년 8월까지, 유성운은 한양 사람으로 1686년 정월에서 9월까지 재직하였다는 기록이다.

    반효자와 조효녀 정려비.

    △ 반효자와 조효녀 정려비

    효자 반석철은 조선 세조 때 벼슬이 주부(종6품)에 이른 자로 부모를 극진하게 봉양한 효행으로 정려를 받았다.

    조효녀는 창녕 조문한의 딸로 아비의 병에 단지주혈(斷指注血:손가락을 잘라 피를 먹임)하고 어미의 병에 허벅지 살을 베어 공양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 비석은 원래 큰길(1042번 지방도)가에 있었는데, 20여 년 전 그곳에 공장을 지으면서 이곳 마을 안 솔숲 아래로 옮겼다고 한다.

    삼충대.

    △ 삼충대

    임진왜란 때 노티재에서 왜군과 맞서 싸우다가 순절한 송빈, 이대형, 김득기의 충성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이곳에는 이들 삼충신을 제사한 송담서원이 있었으나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지금은 훼손되고 없다.

    작고 아담한 계곡 옆으로 노송이 우거져 있고, 툭 트인 들녘을 바라보면 저절로 잡념이 사라져 무아(無我)의 경지에 빠진다. 지금은 신안경로당이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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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옛길 길라잡이- 최헌섭 두류문화연구원장

    “무작정 길 만들기보다 얘기가 있는 옛길 살려야”

    최헌섭(48·사진) 원장은 창원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경남문화재연구원 연구과장과 경남발전연구원 역사문화센터장으로 근무했다. 지금은 김해에서 두류문화연구원을 운영하고 있다.

    ▲ 왜 하필 옛길을 찾아 나섰나.

    - 옛 문화에 대한 연구를 하다 보니 문화의 이동로에 관심을 갖게 됐다. 길을 따라 교류가 이뤄졌다. 고향이 창원시 동읍 용전리다. 내 고향부터 문화가 이동했던 곳을 찾아보자는 욕심이 생겼다.

    ▲ 지금까지 어디를 다녔고, 어디를 다닐 것인가.

    - ‘영남역지’에 수록된 옛 역도와 각각의 역을 잇는 길을 조사하고 정리하기 시작한 지 여섯 해가 지났다. 첫 작업으로 조선시대 자여도를 조사해 책으로 펴냈다. 앞으로 황산도(동부경남·부산·울산·경주 일부), 소촌도(진주·남해·하동·사천·통영·거제), 사근도(함양·산청·거창 일대)를 걸으며 이 길과 이어지는 장수도, 생현도 등으로 외연을 넓힐 것이다.

    ▲ 옛길이 사라지고 없거나 걸을 수 없는 곳도 많다.

    - 길을 만드는 데는 ‘편리’라는 시대의 논리가 있다. 부정하진 않지만 옛 사람의 기억을 정리해보려는 후손들의 노력이 있어야 한다. 우리의 옛길에는 많은 얘기가 있다. 그것이 스토리텔링이다. 둘레길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무작정 길을 만들 것이 아니라 얘기가 있는 우리 옛길을 잘 살리는 것이 중요하다.

    글=이학수기자 leehs@knnews.co.kr

    사진=김승권기자 skkim@knnews.co.kr

    답사 동행=최헌섭 두류문화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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