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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의력, 인문학에서 움튼다- 한후남(수필가)

  • 기사입력 : 2011-03-04 09:5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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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을 쓸 때마다 창의력 빈곤을 한탄할 적이 많다.

    예술가는 일반인들과는 다른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무한한 상상력을 풀어 놓는 사람이다. 생목숨을 뚝뚝 떨구는 붉디붉은 동백을 보며 가슴 에기도 하고, 고물대는 지렁이 한 마리에서도 무한한 생명력을 얻곤 한다. 부족한 상상력을 채우려 전시회를 둘러보고 시집을 챙겨 읽으며 시인들의 정제된 언어를 엿보기도 한다.

    요즘 재계 3세 CEO들이 미술관을 많이 찾는다고 한다. 예술을 통해 ‘창조적 경영’을 배우기 위함이다. 과거의 성공방식으로는 첨단을 치닫는 경쟁자들을 따라잡을 수 없다. 낯선 시선으로 기존 인식을 타파하고, 잠재된 가능성을 찾아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

    예술가들의 창조성, 혁신적 발상 전환을 그들의 자구책으로 삼은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지난해 말, 한 청년의 자살보도를 접하고 한동안 가슴이 먹먹했었다. 그는 모형자동차 설계로 세계대회를 석권한 대단한 발명가였다. 그 실력을 인정받아 카이스트에 입학했는데 두 번의 학사경고를 받고 극단적인 길을 택했다. 미적분을 포함한 고등수학이 장래가 창창한 젊은이를 죽음으로 내몰았던 것이다. 교육학을 전공한 사람으로서 현재의 교육제도에 참담함마저 느끼게 되었다. 30년 전 우리가 교육받은 방식에서 한걸음도 더 내딛지 못하는 갑갑한 교육현실에 울분이 터졌다.

    눈부시게 발달하는 물질문명에 반해 인간 문화는 오히려 더 저급해져 가고 있다.

    전쟁 후 반세기가 넘는 동안, 우리는 경제 발전을 향해 곁눈 한 번 팔지 않고 달려왔다. 그 과정에서 눈으로 드러나는 생산효과를 위해 개인의 삶은 희생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앞으로의 사회는 양보다 질을 따지는 삶이 바람직하다. 따라서 교육의 목표도 바뀌어야만 한다. 오로지 성적으로만 평가받아온 세대는 사고력이 부실하다. 한 번도 자신의 인생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결정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아서이다. 중요한 청소년기를 오로지 점수 따는 기술만 습득한 아이들이 사회에 나와 겪는 크나큰 괴리를 어떻게 감당해 낼 수 있을 것인가!

    교육채널을 통해 하버드대의 ‘정의란 무엇인가’의 저자 마이클 샌델 교수의 강의를 보면서 참으로 부러웠다. 물론 석학의 강의도 훌륭했지만 학생들이 거침없이 자신의 철학을 피력할 수 있는 강의실 분위기가 우리의 현실과 비교되어 우울했다.

    인문학을 중요시 여겨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호기심이 없는 아이들은 질문이 없다. 질문 없는 아이들은 자라서 자신의 생각이 없어진다. 물론 토론할 줄도 모른다. 이런 아이들이 커서 반문화적 몸집만 웃자란 성인이 되는 것이다. 싸움질하는 형제더러 커서 뭐가 되려나고 역정을 냈더니, “국회의원 되려고요” 했다는 한 국회의원의 체험담을 우스개로만 넘길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우리와는 달리 미국 유명대학에 입학하려면 왕성한 지적 호기심을 입증해야 된다. 해서 개인 에세이에 비중을 두고 신입생을 뽑고 있다.

    이천 년 전 사람들인 공자, 소크라테스 등이 아직껏 우리 삶에 큰 힘이 되는 걸 보면 반드시 인문학은 부활되어야 한다. 우리가 궁극적으로 기대고 자문해야 할 사람은 그들인 것이다. 인문학은 인간에 대한 인간을 위한 인간에 의한 사유이기 때문이다.

    고교 과정에서 빠졌던 국사 과목이 다시 부활되리라는 반가운 소식이 들린다. 늦었지만 매우 다행스런 일이다.

    한후남(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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